영화를 보다가 발견한 추억의 장소
4년 전, 베를린에 있는 동안 난 유난히 독일 영화를 많이 찾아봤다. 그건 독일어를 조금이라도 듣고 이해해보고자 하는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 당시 우울하고 염세적인 생각에 잠식됐던 내게 뻔한 감동이나 오락적인 요소의 영화보단 삶의 모순이나 어두운 면에 대해서 조명하는 독일 영화가 자연스레 이끌렸던 탓이 컸다. (그 취향은 이제 조금은 굳어져 내가 아내에게 영화를 보자고 하면 ‘혹시… 독일영화냐’고 말하며 뒷걸음질 치기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으로 본 영화는 1987년에 개봉한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영화다. 주인공은 전지전능하고 불멸의 존재를 가진 천사인데 그는 다른 천사들과 달리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내려다보며 동경하고 그런 실감 나는 삶을 꿈꾸기까지 한다. 환희, 쾌락 … 심지어 고통, 슬픔, 불안까지도… 모든 것들이 그의 눈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다. 천사의 시선으로 그린 이 영화는 대부분 흑백으로 전개되지만 인간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잠깐의 순간은 색깔이 돌아온다는 점이 흥미롭다. 꽤 공상적인 요소를 가진 영화이지만 천사의 눈에 비친 다양한 인간 군상은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인간과 천사 두 존재의 감정에 모두 깊이 이입됐다. 이 즈음 나는 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의 방향과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재정립해나가던 시기였는데 돌이켜보면 이 영화가 그 결정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게 아녔을까 싶다.
최근 문득 그 영화가 떠올라 다시 찾아서 보았다. 천천히 보는데 전승기념탑 동상에 올라간 천사의 장면이 나왔다. 다음으로 천사의 관점으로 내려다본 베를린 시내가 나왔다. 그 순간 그 장면이 너무도 익숙해 순간 영화를 멈추고 외장하드에 사진 파일을 뒤적거렸다. 열어보니 내가 2018년 겨울 전승기념탑 위에서 찍어놓은 사진 중 하나와 일치하는 구도였다.
그 해 겨울, 나는 귀국을 앞두고 전승기념탑에 올라가 베를린 시내를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을 다잡았다. 돌이켜보면 참 행복한 순간이었다. 해 질 무렵 버스를 타고 급히 이곳을 찾아 올라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전경이 실로 아름다워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바로 내 머리 위에는 날개를 단 동상이 있었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 줌을 당겨 사진도 찍었다. 사진만 남은 줄 알았는데 집에서부터 기념탑까지 오면서 전자책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과 맨 위로 올라가서는 이센스의 Sleep Tight 가사를 음미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는 사실도 떠올라 흠칫 놀랐다. 탑에서 내려와 마주친 어둑어둑해진 도시와 불 켜진 퇴근길 차들까지… 결국 그 모든 순간이 겹치고 겹쳐 내게 지금까지도 행복감을 주는 하루로 깊이 남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 하늘의 천사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만약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천사라면 한정된 인생을 아내와 함께 나름대로 알차고 즐겁게 보내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어주고 있지 않을까 하고 주제넘는 상상을 해본다.
*영화 속 주인공 ‘브루노 간츠’는 2019년도에 사망하였는데 다른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이 영화에서 인상이 참 좋아 마음에 오래 남는다. 진짜 어딘가에서 천사로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