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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hum Nov 20. 2021

가을, 기차 타고 서울로 당일치기 출장

오랜만에 느껴보는 서울의 가을

 기차를 타고 서울로 당일치기 출장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니 서울 강릉을 오가는 열차가 KTX산천에서 KTX이음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름만 바뀐 건 아니다. 검색해보니 전기로 움직이는 저탄소·친환경 고속열차라고 하는데... 것보다 나에겐 앉자마자 좌석 가운데에 위치한 스마트폰 무선충전기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창문이었다. 이전 열차는 앞뒤로 2인마다 통창문이 있어서 바깥 풍경을 보고 싶어도 내 앞이나 뒷사람이 햇빛을 싫어하면 블라인드를 내린 채로 가야만 했는데 이젠 좌석 옆에 개인 창문이 하나씩 딸려있었다. 풍경을 널찍하게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날 위한 작은 창문 하나가 주어졌다는 것은 역시 신나는 일이다. 언뜻 보니 아담한 창문이 마치 작품의 프레임처럼 느껴졌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가을 풍경들 하나하나가 그림 같아서 셔터를 연신 눌렀다. 강원도의 산과 강을 지나 서울 외곽의 풍경이 하나 둘 등장했다.  낡은 집부터 한강을 지나 용산의 새롭게 건축 중인 빌딩까지…  그 와중에도 가을 나무들은 건물 사이사이를 비집고 제멋대로 자기 색을 발산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서울 도심의 전경을 보고 있자니 시야가 흐릿해지며 취업을 위해, 출근을 위해 혹은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위해 이 안에서 분주히 뛰어다니던 내 과거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이내 현재의 풍경에 다시 초점이 맞춰졌다. 나 자신에게 ‘네가 진짜 이곳에서 십여 년을 살았던 거니?’하고 질문을 던졌다. 행복으로만 점철될 수 없는 시간들... 그럼에도 이 복잡한 도시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용캐 20대를 버텼구나싶어 스스로가 대견해졌다. 과거의 내가 낯선 타인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거리로나 시간적으로나 한참의 여유를 두고 나서야 내 삶을 새로운 눈으로 관조할 수 있게 되는것 같다.



기차 창밖 바라보기



 강릉에 이사오고나서 좋은 점은 서울을 온전히 여행지로 인식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매일 출퇴근 때 탔던 지하철과 그 안의 사람들, 따분하게만 보였던 한강도 전부 낯설고 어딘지 가슴 한 켠이 두근거린다. 서울역에서 내려 걷는 순간 본격적인 여행자의 마음이 시작됐다. 그 기분엔 역시 가을의 풍경도 큰 몫을 했다. 특히 덕수궁 돌담 너머 안으로 보이는 형형색색 나무들의 풍경은 마치 궁궐에서 왁자지껄 소란스럽게 떠드는 인파처럼 느껴졌다.


 하루 종일 볼 일을 다 마치고 저녁 무렵 잠시 아버지를 뵈러 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동네다. 오래된 슈퍼, 정육고깃집 대부분 그대로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당시엔 내 의지와 달리 이곳을 떠나 멀리 떠돌아다닌 듯하다. 동네를 찬찬히 살펴보며 생각했다. 과연 평생 여기 살았다면… 내가 그리도 갈망했던 안정이 주어져 이곳에 오래오래 머물게 되었더라면 지금의 난 어떤 사람으로 존재할까? 그런 상상을 해보니 그동안의 정처 없던 내 삶의 여정이 전부 축복처럼 여겨졌다. 아버지와의 소원했던 관계도 많이 달라졌다. 미움이나 원망이 있던 자리엔 연민과 이해가 남았다. 지나고 보면 세상사가 다 수긍이 가는 일들인가 보다.


 남사스럽지만 3  가을, 베를린의  공원 벤치에 앉아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오디오북으로 듣다가 왈칵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눈앞을 굴러다니는 낙엽들 때문인가... 동화속 왕자의 눈에 비친 비참한 인간군상에 대한 연민 때문인가. 머리론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어떤  몸의 오작동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후로 매년 잎이 떨어지고 굴러다니는 가을만 오면   없는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지난 가을엔 선교장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오르간 연주회에 참석했다. 울림있는 오르간 소리에 감동을 느끼며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내는 그런  사진으로 몰래 찍어두고 심심할 때마다 놀린다. 하지만  순간의 황홀한 감정은 여전히  가슴에 남는다. 가을을 탄다는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감성이 풍부해진다는데... 앞으로가 조금 염려되면서도  편으로는 기대도 된다.



*뜬금 없지만... '서울', '가을' 단어가 참 이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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