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단상

"소주 한 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by 하일우


13일의 금요일. 인사동 <유목민>을 찾았다. 주역 육효학의 바이블인 복서정종(卜筮正宗)을 왕년의 도반들과 낭독하고, 달뜬 기분을 막걸리로 달래고자. 해물부추전에 '송명섭 막걸리'를 골랐다. 얼마나 맛있으면 주조 장인의 이름을 브랜드로 내걸었을까 싶어서.

잔뜩 기대하고 개봉했는데, 뷁~ 실패다. 송氏 아저씨 굉장히 드라이하시네. 일말의 달달함도 용납치 않는다. 슈퍼 드라이! 그 순간 뚜껑이 열리면서 또라이 모드. 주모를 불러 세웠다.

"이거 맛이 좀 이상한데요. 상한 거 아니에요?"
"원래 그런 거예요.

인공감미료를 전혀 섞지 않아서 그래요.
우리 선조들이 먹던 맛 그대로에요."

그러하다. 고마우신 조상님들 단내 나게 일하시고, 이리도 쌉싸름한 막걸리로 목 축이셨구나.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야 마땅하나 미뢰들이 불초(不肖)하야 지못죄. 특단의 조치로 칠성사이다를 꺼내들었다.

사이다 뚜껑 따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블렌딩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이, 뜻밖의 아스파탐이 귀로 흘러들었다. 옆 테이블에 둘러앉은 중년 노마드들께서 노래를 시작하신 것. 막걸리 부어 드시려고 통기타 들고 오신 줄 알았는데, 팅가팅가 튕기고 계신다. 그것도 상당히 노련한 솜씨로.

그런데, 귀가 한 번도 들이켜본 적이 없는 녀석이다. 노래방 주민번호도 없을 듯한. 멜로디 잔잔하고, 메시지는 짱짱하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실어나르는 '비뇨생식기' 후렴구에 맞춰 '하 과장 막사' 사발을 부딪혔다.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물개 박수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난생처음 듣는 노래의 정체가 궁금하여 강호의 고수께 여쭈었다. 백창우 시인의 '소주 한 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에 곡을 붙였단다. 그분은 가수 이진엽 씨였고, 그들은 수시로 공연하는 노래패였다.

마왕의 '민물장어의 꿈'에 이어 감미로운 팝송들이 뒤따랐다. 우리 술판의 정권도 봉평메밀막걸리로 바뀌었다. 비처럼 촉촉한 생음악에 귀 기울이며 잔을 기울였다. 인근 민가에서 민원이 들어올 때까지.

파장(罷場) 후에도 파장은 오래 갔다. 유튜브에서 끄집어낸 노래를 귀에다 거듭 들이부었다. 가사가 된 시어를 마른 안주처럼 씹고 또 씹으며.




"소주 한 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http://www.youtube.com/watch?v=BG_9Fk66AVE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참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 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니체가 그랬다. 우리는 음악을 근육으로 듣는다고. 청각과 정서만이 아니라 운동 근육까지 건드리는 게 음악이란 얘긴데, 이 노래가 그렇다. 듣다 보면 두 주먹 불끈 쥐게 된다. 으랏차차 의욕이 발기한다.

지친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이는 권주가(勸酒歌) 중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란 대목은 <송곳>의 부진 노동상담소에서 구 소장과 소진이 나눈 대화와도 오버랩된다.





구고신 :

"다른 정류장에서 다른 버스 타고 가면 되지.
버스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기다리면 뭐 해."

문소진 :

"아무도 안 기다리면 더 이상 버스가 안 서요.
더 이상 버스가 안 서면 결국엔 정류장도 없어져요.
그럼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어떡해요?
이 정류장이 종착지인 사람들은 어쩌냐고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아무개들이 주변에 부쩍 늘었다. 기다리는 세상이 다가오기는커녕 저 멀리 아득히 달아나는 듯하니까. 새삼스레 안도현 시인이 '기다리는 사람에게' 건넨 충고가 떠오른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뒤이어 시인은 덧붙인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굽이굽이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汽笛)으로 울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기대 없이 돌아서느니, 기다리겠노라. 무턱대고 기다리느니, 성큼 다가가련다. 찾아가보자. 정류장 넘어 기관차 되어. 바람 없는 날, 바람개비 돌리는 법은 앞으로 내달리는 것뿐! 바람이 없어도 좋다. 바람이 되어 우리가 가는 거다. 물대포 세례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 가슴에 지피고. 소리라도 지르며 무대포 정신으로. 함성이 기적(奇跡)으로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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