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
일 마친 아내가 아침에 집에 오자마자 챙긴 건 노오란 캐리어였습니다. 순간 직감합니다. 저 녀석의 오랜 공복이 오늘 드디어 풀리겠구나. 남쪽으로 질주하다 장안휴게소에 잠시 들릅니다. 소떡소떡 등으로 캐리어 소유주의 공복부터 풉니다.
부산항은 쾌적하게 한적하더군요. 간편하게 탑승 수속 마치고 쾌속선 비틀(BEETLE)에 몸을 파묻었습니다. 맥주 거품 같은 구름이 하늘에 떠다녔지만, 기분은 전혀 쾌청합니다.
안내양이 건네준 아사히 캔맥주의 뚜껑을 딸깍 땄거든요.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포옹하는 뉴스가 캬, 청량감을 더합니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로 오남용되는 '임나국(任那國)'이 실제로 있었던 섬의 히타카츠에 발자국 찍은 건 그로부터 한 시간 10분 뒤.
'임나(任那)' 관련 지명이 80여 개나 박힌 섬에서 가장 먼저 한 건 렌트카 수령이었습니다. 날씨도 그렇고 기분도 그렇고 하여 라멘 한 그릇부터 해치우려 하였으나, 일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뭐, 화요일에 쉰다는 집이 수요일에 쉴 수도 있는 거죠. 비정기휴일이 많다더니 역시나. 이 세상 어딘가엔 ER처럼 연중무휴 라멘집이 있어야 한다고, 소리 없이 아우성치고 플랜 B를 실행합니다.
호빵맨이 지키는 아담한 소방서랑 장구한 세월 스민 신사를 스치며 유유히 뜻대로 굴러갑니다. 일본 악센트 스민 한국어로 렌트카 안내양이 알려준 지점에 당도했는데, 어라 뜻밖에 입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슈퍼 밸류 다케스에 오우라점 뒤통수로 우릴 이끌었더군요.
뒤통수 맞았지만 통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마트에 들어가자마자 아내 REM(Rapid Eye Movement)의 RPM이 급격하게 올라갔거든요. 허기 달랠 초밥과 오니기리 등을 챙기고, 정체가 궁금한 아이템들을 하나씩 장바구니에 쓸어 담습니다.
테라오카 계란 간장 곁에 있던 기린 미니 캔맥주는 무척 반가웠습니다(아사히 미니미에 소주 한 잔 부으면 세상 완벽한 소맥이 완성됩니다. 기린 미니미와 소주의 케미도 얼른 실험해보고 싶네요).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 냄새와 바삭하게 튀겨지는 치킨 냄새 스치며 드러그 스토어로 건너갑니다.
가정상비약으로 딱 좋은 제품들 골라서 장바구니 살찌웁니다. 가장의 표정도 딱 좋습니다. 뇌에서 약 흘러나올 때 볼 수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엔돌핀의 4,000배라는 다이돌핀의 위력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시간의 흐름도 잊을 만큼 몰입한다는 플로(Flow) 상태에 빠져든 듯했습니다.
그 와중에 전 마트의 모국어 교정에 몰입했습니다(최근에 <소설의 첫 문장>, <동사의 맛> 등 김정선 작가님 저서를 탐독한 여파로 추정됩니다). 쓰시마키타경찰서의 경고문에서 오타를 포착했어요. 훔치기는 ‘법죄’ 아니고 범죄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하다 시각을 자각한 가장.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집니다. 배 놓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거든요. 전날 읽은 <편의점 인간>은 복선이었을까요.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며 편의점에게 러브레터까지 남긴 무라타 사야카는 이렇게 씁니다. ‘속도가 승부를 가르므로, 머리는 거의 쓰지 않고 내 안에 배어 있는 규칙이 육체에 지시를 내리고 있다.’
소설 읽을 땐 추석 명절 응급실의 제 모습 떠올리며 감정 이입했었는데, 귀국 서두르는 ‘슈퍼 인간’의 자태가 딱 그랬습니다. 노오란 캐리어에 노획물들 꾸역꾸역 밀어넣고 차에 시동을 걸고, 왔을 때보다 4배속으로 돌아갑니다. 주유소 들러 기름 만땅 채우고 렌트카 반납하고 히타카츠항까지 배불뚝이 캐리어 질질 끌고 갑니다. 지름신이 보우하사 무사히 비틀에 안착합니다.
이상 대마도에서 장본 이야기였습니다. 조만간 캐리어가 또 하드캐리할 겁니다. 아내 안에 배어 있는 역마살 규칙이 육체에 지시를 내릴 거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조안이 데리고 다시 대마도 들쑤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