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 당직실 문을 누군가 두드립니다. 심야의 정적을 깨는, 숨 돌릴 틈을 막는 사운드. 살짝 불안한 맘으로 살포시 문을 열었습니다. 응급실 보안요원의 안내를 받아 한 여인이 성큼 다가오네요. 절 보자마자 냉큼 뭔가를 건네줍니다. 받아 보니 목각 도장. 아니 뭐 이런 걸 다, 라는 모스 부호를 눈빛에 실어 깜빡거렸습니다.
“저번에 감사했어요. 꼭 뵙고 인사 드리고 싶어서, 일하시는 날에 맞춰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여인은 요양 센터 관계자이셨고, 제 섬세한 설명 덕분에 큰 위기를 넘겼다고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생각이 나더군요.
얼마 전, 아흔 살 할머니께서 응급실에 실려 오셨습니다. 무릎이 퉁퉁 부으셨더군요. 사진 찍어 보니 역시나 경골 골절. 부러진 정강이뼈 상태를 아드님께 보여드리고, 통증이 잦아들 수 있도록 재깍 조치를 취했습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일일이 언급하며 솟구치는 궁금증을 조목조목 풀어드렸습니다. 의혹이 모조리 풀린 후련한 눈빛으로 꾸벅 인사해주시더군요.
이튿날 정형외과 외래에 들르셨던 할머니 보호자는 제가 퇴근한 응급실에 다시 찾아오셔서 감사한 마음을 또 전하고 가셨답니다. 설명 와중에 제가 신경 쓴 대목 중 하나는 ‘믿고 맡긴 요양원을 원망하진 마시라’는 거였습니다. 그게 시설 관계자분들에게 미약하나마 힘이 된 모양입니다. 하여, 음료수나 야식이 아닌, 도장을 뜻밖에 받아보네요.
치료는 약이 하지만, 치유는 말이 합니다. 약발을 증폭시키는 플라세보(placebo). 위약僞藥이지만, 보약補藥일 때가 참 많습니다. 다급한 환자와 예민한 보호자들이 수시로 밀려드는, 병원의 첫 인상을 좌우하는 ER에선 더더욱.
새 일터에서의 첫 행보가 긍정적이라 참 다행입니다. 병원에 서류들 제출하면서, 한동안 까먹었던 전문의 자격증 번호도 다시 뇌리에 새겼습니다. 극도의 후달림 끝에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되었던 순간의 초심과 더불어.
아무쪼록 어르신들은 발조심. 아무 때든 의료진들은 말조심!
한 고조(漢高祖)는 소하(蕭何)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으나 너희들은 베풀 것이 없으니 오직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 덕 중에는 언덕이 제일이니라.
남의 말을 좋게 하면 그에게 덕이 되어 잘되고, 그 남은 덕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고 남의 말을 나쁘게 하면 그에게 해가 되어 망치고, 그 남은 해가 밀려서 점점 큰 재앙이 되어 내 몸에 이르느니라.
뱀도 인표(人票)를 얻어야 용이 되나니, 남의 말을 좋게 하면 덕이 되느니라. 평생 선(善)을 행하다가도 한마디 말로써 부서지나니 부디 말조심하라.
道典 8:2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