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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부건 Dec 16. 2019

연말엔 역마살

하늘은 자시에 열리고, 땅은 축시에 열리고, 사람은 인시에 일어납니다. 인기어인人起於寅!

일찌감치 일어나 하루를 엽니다. 아내가 모는 차의 조수석에 올라탑니다. 빽빽한 출근길 도로를 뚫고 울산공항에 당도한 시각은 오전 8시. 아침부터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공항의 검색대를 곧바로 통과하여 비행기에 착석합니다. 8시 20분에 활주로에서 꿈틀대기 시작한 비행기는 청명한 대한민국 창공을 상쾌하게 가로지릅니다.



김포에 착륙한 시각은 오전 9시 10분경. ATM에서 노오란 현찰을 넉넉히 뽑아 봉투에 담습니다. 서둘러 택시를 타려는데 낯익은 이름이 공항에 울려퍼집니다. 하민석 고객께서는 공항 안내 데스크로 와주십시오.” 친절한 직원께서 낯익은 물건을 제게 보여주십니다. 아뿔싸, 신한은행 현금인출기 위에다 지갑을 두고 왔었네요. 장부에 서명을 하고 카드 지갑을 외투 주머니에 착석시킵니다. 다시금 대오각성.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중국 해우소 문구. ‘앞으로 작은 한 걸음, 문명의 큰 한 걸음!’

인천으로 빠져나가는 택시에 올라탑니다. 버스로 50분 거리인 목적지까지 20분 안에 당도합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만 10명 보유한 메디플렉스 세종병원의 깔끔한 로비를 가로질러 장례식장으로 흘러듭니다. 부탁을 받은 조의금을 여러 봉투에 나눠 내고, 아내의 학부 선배 부친의 영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조문객들 틈에서 육개장으로 조식을 해결합니다.

상진이 형님과 맥주 마시며 국카스텐, 넬 공연 등을 만끽.

지난 5월에 난지한강공원에서 그린플러그드 뮤직페스티벌을 함께 즐겼던 상진이 형이 뜻밖에 등장한 울산 시민을 무척 반겨주네요. 상주인 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답니다. 조문하러 왔다가 오래 머물고 있는 느낌이라네요. 올해 봄까지 등산을 즐기실 정도로 건강하셨던 부친의 신장이 갑자기 안 좋아지셨답니다. 매년 이맘때 따뜻한 내의와 외투를 부친께 사드리곤 했는데, 뜻밖에 멀리 떠나보내어 몹시 황망한 듯했습니다.


NELL의 <기억을 걷는 시간>.                                                  연말마다 숨 고르며 누립니다. ‘기억을 걷는 시간’.

장례식장 빠져나와 다시 김포로 돌아옵니다. 해외로 떠나는 각양각색의 나그네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9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송파나루역 인근의 커피숍에서 프랑스 유학파 건축사와 재회하려 하였으나, 돌발 상황이 발생하여 불발. 출판업에 종사하는 타로 마스터와의 접선을 시도했으나, 집결 장소와 시간이 애매하여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습니다.


공약 남발자들, 부디 각골명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의 묘미죠. 뜻밖에 확보된 시간 틈새를 강남의 터줏대감들과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변수 많은 인생 방정식에서 정수 같은 존재들 만나러 선릉으로 이동. <밸런스 포인트>라는 아담한 커피숍에서 현배 형과 마주 앉습니다. 벽에 박힌 기도문과 구수한 커피 풍미가 긴 여운을 남기는 곳이더군요.


<밸런스 포인트> 커피숍 벽에 쓰여진 기도문.

주인장께서 키우는 견공의 재롱을 한 손으로 격려하며, 다른 한 손으로 노트북에 담긴 강의 PPT를 매만졌습니다. 박학다식한 형님에게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행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무상으로 뽑아냅니다. 매달 이어가는 강의가 덕분에 더욱 풍성해질 듯하네요.

<밸런스 포인트>의 아메리카노는 적당히 쓰고 구수합니다.

형님이 일독을 권한 책들(<날씨가 바꾼 어메이징 세계사>, <단어로 읽는 5분 세계사>, <전쟁 국가 일본의 성장과 몰락 : 러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까지>,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 소와 소고기로 본 조선의 역사와 문화>,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 세계의 전쟁이 만들어낸 소울푸드와 정크푸드>)도 쌓아두고 하나씩 독파하렵니다.


8월 24일 홍대에서 한일고 선배님들 진로 살피며, 진로 홀짝.

짧으나 굵직한 회동을 마치고 선릉역 위워크로 향합니다. 절친 테드랑 한일고 선배이신 재필이 형님과 재회했어요. 라운지 소파에 앉아 맥주 홀짝이며, 두 귀인의 팀워크를 타로카드로 짚어보았습니다. 테드는 태양이 축복하는 백마이고, 재필 형님은 백마와 흑마가 끄는 전차의 장군이시네요. 호흡 잘 맞추면 경주에서 1등 거머쥘 수 있는 찰떡궁합입니다. 여러 조짐들이 매우 상서롭습니다. 의기투합 잘하면, <도그TV>가 나날이 나아갈 겁니다.


와인 대가, 캠핑 고수와 건배.

인파로 북적이는 불금 퇴근 시간의 2호선 지하철에 몸을 구겨넣고 종합운동장역으로 건너갑니다. 나주에서 올라온 용희 형님과 재회하여 <컴파스 라운지>로 향합니다. 하영 형님이 맹활약하시는 와인바에서 모처럼 잔을 부딪힙니다. 화이트와인 캐슬  샤르도네는 싱그러운 송어회랑 잘 어울리네요. 보쌈과 족발을 씹고 뜯으며 멕켈란 12년산까지 음미합니다.


매우 유익하고 유쾌했던 개천고 수학여행.

지난 여름 베트남 호치민 부동산 투어 때 만난 두 형님의 근황을 살피고, 캠핑과 와인 등에 대해 담소를 나눴네요. 다채로운 경험을 탑재하신 인생 선배님들과의 만남은 여러모로 유익하고 풍요롭습니다. 흡족한 불금 파티 마치고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인 뒤, 아침 일찍 대전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대전의 아지트에 당도하고서야 자각합니다. 하영 형님이 챙겨주신 와인과 위스키를 노래방에 두고 왔다는 것을. 숙소엔 휴대폰 충전기를 놓고 왔다는 것을.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것은 눈물과 지갑만이 아닙니다.


인턴 선생 없는 ER에서 주말 내내 갱무꼼짝.

한결 비장한 각오로 주말 응급실에 들어섭니다. 전공의 시험이 치뤄지는 주말이라, 인턴들 없이 제가 초진에 임해야 합니다. 4주간 함께 일한 인턴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고, 여수가 고향이라는 간호사(덕분에 여수 엑스포 파견근무 시절 회고) 등과 다채로운 환자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잘못 휘두른 볼링공은 끔찍한 흉기.

친구가 장난으로 휘두른 볼링공에 눈썹 찢어진 청년,  술 마시고 넘어져 무릎 찢어진 처자, 해산물 드시고 얼굴에 두드러기 생기신 ‘장금이’ 아주머니, 새벽기도 다녀오시다 넘어져 윗팔뼈 부러지신 할머니, 자동차 문에 엄지 끼었다는 여인, 수영 시합 앞두고 다이빙 연습하다 코를 다친 (가수 적재 닮은) 제주도 청년, 경기 중에 아킬레스건이 뚝 끊어진 축구 선수 등등.


네가 새벽 네 시에 온다면 난 새벽 세 시부터 잠을 설치기 시작할 거야. ​기어이 네 시가 되면 나는, ​안달이 나서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토요일 정오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밀려드는 환자들을 최전방에서 선방하고, 청주로 건너갔습니다. 네이버 밴드 통해 인연 맺은 이재환 선생과 드디어 만났네요. 제가 올린 글들을 깊이 공감하며 읽어준 고마운 인연입니다. 금강 휴게소에서 절 목격한 적도 있었다네요. 울산에서 대전 가는 버스가 늘 들르던 휴게소를 지나쳐 금강변에 머물렀던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뜻밖의 변수가 뜻깊은 접점을 뽑아내는 게 인생의 묘미죠.


근래 보기 드문 ‘호연지기’를 탑재한 친구.

접선 장소를 두루 물색하다 성화동 <반도회수산>에서 소주잔 부딪혔습니다. 이 선생이 손수 밥알 뭉쳐서 돔을 얹어 건네준 스시가 술맛을 북돋아줍니다. 탁월한 풍미가 고군분투 주말 당직의 피로를 사르르 녹이네요. 정겨운 미식가를 친구로 얻은 심야에, 그가 손수 빚은 맥주까지 얻어서 청주의 아지트로 뿌듯하게 돌아왔습니다.


지구촌의 각양각색 숙취 해소법.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술에는 술.

월요일 아침, 숙면 후에 숙취 없이 기상합니다. 울산 아해의 전화를 받고 외출 준비를 서두릅니다. 장인어른과 함께 오송역 거쳐 청주로 들어온 하조안과 재회한 곳은 <개신동 해장국>. 선지 품은 콩나물 해장국을 빨아들이는데, 홀서빙 아주머니께서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시네요. 꼬마가 벌써 이렇게 컸냐며 사과까지 깎아서 건네주십니다. 괄목상대 일취월장 아이의 성장이 세월의 무상한 흐름에 유력한 물증을 제시합니다.


해장국 든든하게 들이키는 아해.

조안이랑 모교 병원에 들렀습니다. 소화기내과 외래 앞에서 고교 선배이자 의대 후배인 김기배 교수님 만났네요. 어쩌다 다치셨는지 다리에 스플린트를 대셨더군요. 얼마 전까지 저도 오른손에  박고 다녔던 터라  불편함이 이심전심 전해집니다. 소아과 외래에서 모처럼 한헌석 병원장님 뵙고 조안이 진료를 보좌했습니다. 치료 효과가 괜찮다며   뒤에  보자고 하시네요.


주사기가 발명되기 전엔 피부를 절개하여 약물을 주입했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조안이랑 주사실로 향합니다. 담당 간호사가 주사약을 챙기며 제게 진지하게 묻더군요. 혹시 하정우 동생이신가요?” 저번부터 건네고픈 질문이셨답니다. 파안대소하고, 팩트를 체크해드렸습니다. 배우 하정우의 본명은 김성훈이고, 원로 배우 김용건이 그의 부친이라고. 올봄에 <걷는 사람, 하정우> 읽고선 매일 만보 이상 꾸준히 걷는 중인데, 요즘 부쩍 그 천만 배우 닮았단 얘기를 자주 듣네요.


Pacer 어플 등을 선용하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보 이상 도보.

병원 빠져나와 오송역으로 이동합니다. 금요일 오전에 비행기 타고 떠났던 울산으로, 월요일 오후에 기차 타고 돌아옵니다. 서울과 대전, 청주와 울산을 오가며 역마살 심하게 뽐냈네요. 국가고시 직전에 시험 범위 전체를 밤새워 훑듯, 보고팠던 귀인들을 찾아가 두루 만났습니다. 영국의 소설가 겸 비평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다죠. 어떤 이는 성당의 신부님을 찾고  어떤 이는 시를 찾지만 나는  친구들을 찾는다.”


곁에 두고 오래 사귄 벗들이야말로 인생이 남기는 궁극의 흑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수의 슈필라움(Spielraum), ‘미역창고’에서 길어올린 사색을 집약한 <바닷가 작업실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에서 김정운 작가는 일갈합니다. 여수 앞바다에는 섬만 365개다. 사실은   개가 부족한데, 바위섬들도 숫자에 맞춰 포함시켰다. 그런데 이런   따지는 인간들이 있다. ‘사랑  해봐서 그렇다. 부족하면 채워주는  ‘사랑이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무미건조한 크로노스(kronos)의 시간을 유미촉촉한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전혀 다르게 바꿔주는 친구들과 2020년 경자년도 경사스럽게 채워가렵니다. 시시콜콜 따지지 않고, 부족하면 채워주는 사랑을 365일 찰랑찰랑 유지하며.



친구를 잘 두면 보배요, 못 두면 수난이라.
친구를 삼으려면 아주 삼아야 하고
같이 죽고 같이 살기로 삼아야 하느니라.

道典 8:49:2~3

울산에서 일하던 시절, 퇴근길에 발굴한 반야심경 우리나라. 우리나라 동남부와 서북부 사이를 수시로 오갑니다.

울산에서 닭똥집 튀김 씹고 쪽갈비 뜯으며, 수신하고 제가하다 다시 기차에 올라탑니다. 한결 쌀쌀해진 공기를 가르며 휘리릭 청주행. 퇴근길 도심에서 택시를 겨우 낚아 분평동의 <수라채>에 안착합니다.

올해의 우수 전공의는 채 선생.
4년 동안 고생했네. 유종의 미 거두시게.

응급의학과 의국 송년회가 한창이네요. 일년 만에 반가운 얼굴들과 재회합니다. 작년에 우수 전공의였던 영민이가 이제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있네요. 막판에 마무리 잘하고 당당히 전문의 되어서 홀가분하게 축배 들 수 있길 염원합니다.


전문의가 되어 그동안 힘들게 병원에서                                           보고 듣고 배운 목적을 달성하길 염원.

호프집으로 이동하여 전공의 시절에 동고동락했던 응급실 식구들과 건배합니다. 늘 생글생글 잘 웃던 하현정 간호사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된 (수라채에서 아주 수려한 춤사위 뽐내준) 최홍락 선생과 결혼을 앞두고 있네요. 아주 흐뭇한 조합입니다.

내년에 또 만나요.

밝고 씩씩한 진숙 선생도 절 무척 반겨주네요. 당시에 팔자 살펴보고선 애 생기는 거 각별히 조심하랬는데, 제 말대로 되어서 놀랐었다고 회고합니다. 제가 예견한 그 미니미 돌보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녀를 보니 그저 기쁘네요.


호프집 주변의 길냥이. 제가 보시한 치킨 잘 먹더군요.

인생은 본래 고독하고, 인연 중엔 그라목손 농약 같은 악인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 와중에 옛 동료들은 참 보약 같네요. 지금 통과하는 운로가 삭막한 사막이라 갈증이 극심하다면, 세계적인 동기부여가 지그 지글러의 당부를 반드시 꿀꺽 삼켜야 합니다. 외롭다고 나쁜 사람들과 다시 어울리지 말라. 목이 마르다고 독극물 마시는 것과 같은 짓이다.”

지금 파고 있는 게 무덤이라면 더 이상 삽질 금지.

각 분야 귀인들의 음덕 속에서 변화무쌍했던 올해도 사르르 사그라드네요. 시시콜콜 장황한 제 얘기를 여기까지 경청하셨다면, 그대도 제게 든든한 귀인이십니다.


버팀목이 있어, 목 넘기기를 또 해냅니다.

절 지켜보는 그 자리, 굳건히 지키고 계십시오. 제가 시간 내서 꼭 찾아갑니다. 차 한 잔, 술 한 병, 밥 한 끼 정겹게 나눌 순간을 학수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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