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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Jun 04. 2020

뇌의 거짓말

[나와 우주의 미스터리]15. 마인드의 착각 ①

■ 새는 나뭇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시가 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웬델 베리의 시 <내가 날아오를 때>다.


"내가 날아오를 때 새처럼 비상하게 하소서.
내가 떨어질 때 잎사귀처럼 후회 없이 지게 하소서."

이에 한국의 시인이자 번역가인  류시화 작가는 이 시를 소개하며 '새가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자답했다.


"새가 가르쳐 주는 것은 머리보다 날개가 더 쓸모 있다는 것이다. 무엇에 그러한가? 인생에 기쁨을 주는 데 있어서 그렇다. 머리는 매우 유용하지만 자주 비상을 가로막는다. 새는 나뭇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뭇가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기쁨을 주는 데 있어서 새의 머리보다 날개가 더 쓸모 있다고 바라본 류시화 작가의 시선은 세상 속에 살아가되 세상에 구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낸 듯 보인다. 동시에 이를 통해 새의 날개보다 머리가 당연히 더 쓸모가 있을 것이라 여겼던 우리의 시선을 한 번쯤 다시 돌아보게끔 만든다.    


■ 우리가 모든 것을 선택한다는 뇌의 착각과 편견


그동안 우리는 뇌는 우리가 믿고 의지하기에 가장 쓸모 있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최근 뇌과학 연구는 이 믿음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뇌의 숨겨진 비밀을 밝히기 시작했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내가 선택한 것은 내가 원했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인간에게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유지되고 존속되어 왔다.


이러한 자유의지 있음은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의 위상을 스스로 만방에 드높였고,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단한 자긍심이자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뇌과학 연구에서 이것은 모두 착각이고 편견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자유의지에 관한 '벤저민 리벳 박사'의 실험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몇백 밀리 세컨드 정도의 극히 짧은 시간 전에 뇌에서는 이미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이 밝혀졌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을 나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뇌에서 이미 선택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오른팔을 들고 싶다고 생각하면 내가 오른팔을 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인지하기 전에 뇌가 먼저 반응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여태껏 믿어온 것과 매우 다른 결과다. 사실은 내가 무언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선택은 내려졌고 선택이 내려진 후에 뇌는 그 선택을 나의 자유의지로 했다는 착각을 만들어 내서 이것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뇌에 대한 또 다른 불편한 진실도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실 보이는 대로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컬러를 보지 못하기에 흑백으로 세상을 본다. 박쥐는 세상을 초음파로 본다. 흑백으로 보는 고양이의 세상과 초음파로 보는 박쥐의 세상이 어떨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몇 년 전 드레스 한 벌 때문에 SNS를 뜨겁게 달군 사건이 있었다. 드레스의 진짜 색깔이 무엇인지에 대한 색깔 논쟁이었는데,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드레스를 두고 사람마다 제 각기 다른 색을 이야기했다. 결국 이 격렬한 논쟁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의 시각이 일치하지 않음을 배울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뇌가 눈에 보이는 색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색이라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똬한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 자체는 우리의 뇌와 빛이 해석하는 결과물이며  뇌는 우리의 기억을 끊임없이 재해석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우리의 뇌가 계산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없음, 뇌의 착각 등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우리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 마인드가 더 이상 우리 삶에 답을 주지 못하는 이유  



인간에게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가 모든 것을 선택한다는 평범한 믿음이 정녕 뇌의 착각이고 거짓말 이리면, 우리는 자연스레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원적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휴먼 디자인 역시 존재의 근본에 대해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존재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한계는 무엇인가? 와 같은 힘겨운 질문들 말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즉 지금 우리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이'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듯하다.


휴먼 디자인에 따르면 인류는 1781년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허셀이 '천왕성'을 발견하면서 7 센터 인간에서 9 센터 인간으로 변이(mutation)했고, 이로 인해 우리 삶에 전례 없는 매우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9 센터 인간으로 변이 한 우리는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아니다. 19세기 이후 호모 사피엔스는 이미 멸종했고, 과거의 7 센터 인간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지금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됐다.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 인 트랜지투스(homo sapiens in transitus)라 불리는 기존과 다른 형태의 9 센터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유효했던 의식의 지배를 받으며 새로운 9 센터 운송수단(vehicle)에 탑재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과도기 상태에 놓여있는 매우 불안정한 존재다.


과거  7 센터 시대에는 전략적으로 작동하는 마인드(mind)의 지배와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시스템이 작동했던 시기다. 지금의 우리와 같은 9 센터 인간에게 과거 7 센터 시대의 전략적 시스템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즉 새로운 9 센터 운송수단을 탑재한 지금의 우리 존재에게는  마인드가 더 이상 우리의 삶에 답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 우리의 삶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저항과 고통의 근본적 이유다. 끊임없이 생각하고자 하는 압박과 알지 못할까 두려운 정신적 근심 속에 헤매면서 무수히 많은 선택지속에서 전적으로 마인드의 힘에 의존해 답을 찾는 고된 과정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그토록 많은 저항이 있는 이유다.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가?   삶에는 그토록 많은 저항이 있는가?  대한 근본적인 이유다.


이것이 지금 우리 존재가 지닌 근본적이고도 커다란 한계이자 마인드가  이상 우리에게 답을   없는 이유다.  

(다음 글 : 마인드의 착각 ② - 몸이 가는 길이 삶이다)

(다음 글 : 마인드의 착각 ③ - 미덥지 않은 날개를 믿고 비상하는 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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