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사랑을 배웠다
어젯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기이한 난장판으로 안내했다.
제목은 '백인 찐따들이 생각하는 아시아 여성'.
호기심에 눌러본 그곳엔 영상보다 더 적나라한 현실의 민낯이 펼쳐져 있었다.
영상 자체는 조악했다. 서양 여성은 '노화'로, 동양 여성은 '동안'으로 단순 도식화한, 어찌 보면 유치하고 흔해 빠진 인종적 판타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진짜 혼돈은 영상이 아닌 댓글창에 있었다. 그곳은 이미 한국인들의 날 선 분노로 가득 찬 전쟁터였다.
"자국에서 도태된 찐따들이나 저런 환상을 가진다."
"언어가 통한다는 엄청난 이점이 있음에도 실패했으면서, 무슨 외국인과 잘될 거라는 환상을 가지냐."
"안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봐야 밖에서도 샌다."
비난의 화살은 영상 속 백인을 넘어, 국제결혼을 꿈꾸는 한국 남성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결국 댓글창은 남녀 갈등의 대리전이 되어, 그 어떤 결론도 없이 서로에게 생채기만 남기고 있었다.
나는 이 기이한 분노를 목격하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굳이 남의 연애, 혹은 남의 판타지에 찾아와 악플까지 달며 열을 올리는 것일까?
단순히 웃고 넘길 블랙코미디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
비난하는 이들의 논리는 주로 "한국에서도 안 팔리는 '도태된' 남자들이 도망치듯 외국 여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실제로 유튜브 등 미디어에 노출된, 소위 '한일 커플'이나 국제 커플의 남성들을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알파 메일'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 경제적 능력까지. 그들은 한국 결혼 시장에서도 '버려진 상품'이 아니라, 언제든 선택받을 수 있는 '우량주'들이다.
그렇다면 생태계의 포식자인 그들은 왜 굳이 언어도 통하지 않는 타국의 여성을 선택했을까? 그들은 도태된 것이 아니라, '탈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더 넓은 선택지를 가진 그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선 것이다.
여기서 혹자는 반문한다. "말도 안 통하는데 어떻게 사랑을 하냐"고.
하지만 언어가 통한다고 해서 정말 마음이 통하는가?
우리는 같은 한국어를 쓰면서도 매일 불통을 겪는다. MBTI의 N과 S가 서로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하고,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족 간에도 대화가 단절된다.
영화 <청설>을 보다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든 명장면이 있다. 청각 장애인과의 연애를 두고 걱정할 법도 한데, 주인공 용준의 엄마는 오히려 무심한 듯 툭, 이런 명대사를 던진다.
"멀쩡한 사람도 말 안 통하는데, 사람만 좋으면 되지."
나는 이 대사가 '소통'의 본질을 꿰뚫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지난 1년간 수어를 배우며 언어 너머의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농인들과 수어로 대화할 때, 물론 불편함은 있다. 하지만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냐고 묻다면 단호히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오히려 화려한 언변 뒤에 숨을 수 없기에, 손짓과 표정, 눈빛의 온도만으로 전해지는 진심은 훨씬 더 깊고 투명했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편리함이 곧 정답은 아닌 것이다.
다시 댓글창의 재판관들에게 묻고 싶다. 타인의 선택을, 타인의 행복을 깎아내려서 당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비웃는다고 해서 나의 결핍이 채워지지는 않는다. 남는 것은 불쾌한 감정의 찌꺼기뿐이다.
나 역시 타인의 행복 앞에서 질투를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혐오로 나를 방어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그들의 방식을 인정해 보기로 했다. 굳이 악플을 달지 않고 조용히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그것이 혐오의 시대에 나를 사랑하고 지키는, 가장 성숙한 어른의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