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초리가 사라진 자리에 괴물이 자란다

두려움을 모르는 아이들, 그리고 침묵하는 어른들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려면 그 시절의 기억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내 학창 시절은 '공포'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슬리퍼를 신고 하교하다 걸리면 싸대기가 날아왔고, 숙제를 안 해오면 당구 큐대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맞았다. 그 시절의 체벌은 분명 야만적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야만의 시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어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선생님이 무서웠기에 우리는 어른을 어려워했고, 최소한 어른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야만의 시대가 끝난 자리에 남은 것은 '문명'이 아니라 '무질서'다.


얼마 전, 비 오는 날 좁은 골목길에서 겪은 일이다. 우산을 쓰고 가던 나는 맞은편에서 오는 남학생 무리를 발견하고, 내 우산을 차도 쪽으로 기울여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좁은 길에서 서로 옷깃을 스치지 않으려 배려하는 건 상식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믿음은 단 3초 만에 깨졌다.


나와 마주친 학생은 자기 우산을 홱 기울이며 내게 들리도록 내뱉었다.


"아, 이 씨발!"


귀를 의심했다. 초면인 어른에게, 그것도 길을 비켜준 사람에게 욕설이라니. 나는 욱하는 마음에 "야! 학생!" 하고 불러세웠다. 예전 같으면 어른의 호통에 움찔하기라도 했을 텐데,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상가 안으로 사라졌다. 쫓아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발걸음을 멈췄다. 그 뒷모습에서 나는 보았다. 그 아이에게 주변 사람들은, 그저 '자기 길을 방해한 NPC'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교실 안의 풍경은 더 가관이다. 몇 년 만에 천안의 한 중학교로 강의를 나갔을 때의 일이다. 쉬는 시간에 한 남학생이 다가와 대뜸 물었다.


"쌤은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당황스러웠지만 "술 잘 못마셔서 별로 안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들이 그 학생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에이, 쌤! 얘 소주 세 병은 그냥 마셔요!"


중학생이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운 일탈이 아니라, 선생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무용담이 된 세상. 어른 앞에서 허세 부리며 가까이가면 담배 쩌든 냄새를 풍기는 그 중학생의 모습을보며 나는 그저 한숨을 삼켰다. 나는 하루 오고 말 강사일 뿐이고, 내가 훈육을 하려 드는 순간 나는 '꼰대'이자 '아동 학대범'이 될 게 뻔하니까.


남자 강사인 내가 겪는 건 그나마 양반이다.


학교 현장에 있는 여선생님들이 겪는 수모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 덩치 큰 남학생들이 젊은 여교사에게 다가가 "쌤, 남자친구 있어요?", "주말에 저랑 만나실래요?"라며 희롱하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은 일상이 되었다. 그 눈빛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 따위는 없다. 그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너는 선생이지만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권력 확인에 가깝다.


우리는 체벌을 없애며 아이들에게 '인권'을 선물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가 쥐여준 것은 인권이 아니라 '면죄부'였다. 잘못을 해도 혼나지 않고, 어른을 능멸해도 처벌받지 않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책임 없는 자유'만을 학습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의 눈치를 보고, 집에서는 부모가 "우리 아이 기 죽이지 마세요"라며 훈육을 포기했다.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존중 대신 조롱이, 예의 대신 혐오가 자라났다. 동방예의지국? 그것은 이제 박물관에나 있는 단어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른을 공경하는 나라가 아니라, 어른이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길을 비켜줘야 하는 '생양아치들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잘못을 지적하는 어른이 사라진 세상에서, 과연 그 아이들은 제대로 된 어른으로 자랄 수 있을까? 아니면 몸집만 커진 괴물이 되어 우리 사회를 집어삼킬까. 골목길에서 마주친 그 학생의 "씨발"이라는 욕설이, 아직도 귓가에 이명처럼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