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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사다(집안의 여인)

by 남궁인숙

이사를 계획하면서 그림 한 점을

구입했다.

영국화가, 윌리엄 헨리 마젯슨의

〈The Lady of the House〉.

물론 원화가 아닌 사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을 선택한

이유는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공간의 태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부엌에 서 있는 한 여인.

그녀는 단정한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식탁을 준비하고 있다.

뒤편 선반에는 접시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고, 창가에서는 빛이 들어와

그 모든 질서를 부드럽게 감싼다.

이 장면은 평범해서 더 본질적이다.


이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짐’이 아니라 질서’다.

버릴 것과 남길 것,

어디에 둘 것인지,

어떤 기준으로 정리할 것인지.

공간은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준이 분명해질 때 비로소 정돈된다.

이 그림 속 접시들은 단순한 식기가

아니라 그것은 반복의 결과로 얻어진

것들이다.

매일 닦이고,

제자리에 놓이고,

다시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시간들.

그 반복이 쌓여 하나의 안정된 공간을

만든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며 ‘정리’가 아니라

‘운영’을 떠올린다.

집은 꾸미는 곳이 아니라 흐름을

설계하는 곳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상태,

누가 와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구조,

상황이 달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준.

그것이 쌓이면 공간은 신뢰를 갖게

된다.


특히 그림에서 인상적인 것은 빛이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은

이 공간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빛은 늘 같은 방식으로 들어오고,

그 빛 속에서 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 반복이 ‘집’이라는 감각을 만든다.


이사를 하며 공간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삶의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더더욱 의도적으로 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림 속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한 가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정돈된 삶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된 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이사를 마치고

이 그림을 벽에 걸었다.

아마도 나는 매일 한 번씩은 이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 나는 내 삶의 접시를 제자리에 두고

있는가."라고.


부엌에 서 있는 이 여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 장면은 오래 시선에

머문다.

접시는 이미 충분한 상태로 선반 위에는

같은 모양, 같은 색의 그릇들이 질서 있게

놓여 있고, 여인은 또 하나의 접시를 손에

들고 있다.

사람들은 이미 충분한데도 왜 계속

정리하고, 닦고, 채울까?

누군가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고,

기록될 이유도 없는 시간.

삶은 대부분 이런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순간들이 쌓여 한 사람의 ‘이미지’를 만든다.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는 결정적인 사건

하나보다 그 사람이 반복해 온 태도를

더 오래 기억한다.

그림 속 정리된 접시처럼,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어떤 질서를 본다.


그림 속 여인은 단순히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집’이라는 공간의 흐름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어떤 접시를 꺼내고

어떤 순서로 놓고

어떤 순간에 식사가 시작되는지를 조용히

설계하는 사람이다.

눈에 띄지 않지만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다.


어린이집도 잘 운영되는 곳을 보면

화려한 이벤트보다 보이지 않는 기준이

먼저 존재한다.

누가 오더라도 같은 상담이 이루어지고

상황이 달라도 같은 판단이 반복된다.

그래서 신뢰가 만들어진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며 ‘친절한 사람’보다

‘기준이 있는 사람’을 떠올린다.

친절은 순간을 부드럽게 만들지만,

기준은 관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여인이 접시를 정리하듯 하루의 기준을

정리하는 사람.

그 사람 곁에는 결국 사람들이 남는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빛이 부엌을

따뜻하게 채운다.

그 빛은 매일 같은 시간에 들어오는

빛이다.

하지만 그 반복이 공간을 집으로 만든다.


삶도 그렇다.

특별한 하루보다 반복되는 하루가 더

중요하다.

누군가의 삶이 안정적으로 보인다면

그건 운이 아니라 정리된 일상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리하기 위한

하루를 살아간다.

접시 하나를 제자리에 두는 일,

말 한마디를 기준에 맞게 선택하는 일,

그 사소한 반복이 결국

한 사람의 '품격'이 된다.




https://suno.com/s/2l3mc7K9usyZqXeF




집의 온도


작사:콩새작가

작곡:수노


1

이사 온 빈 방에

빛이 먼저 들어와

아직 정리 안 된 하루를

가만히 비춘다


접시 하나 꺼내어

제자리에 두고

흐트러진 마음도

조금씩 맞춘다


익숙한 손끝으로

시간을 닦아

말없이 반복된

하루를 쌓아


누군가 모를

이 작은 움직임이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든다


라라라라

빛이 머무는 자리,

그곳이 나의 집

조용히 이어지는

나만의 리듬


크게 달라진 건

하나도 없지만

오늘도 나는

나를 정리한다


흔들리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하루의 기준을

다시 세운다


보이지 않아도

괜찮아

이건 내가 지켜온

나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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