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부짖는 황소 2 - 이중섭 화가

by 남궁인숙


결혼 후 이중섭 화가는 명사십리 해안으로 잘 알려져 있는 원산 해안가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두 아들을 낳았다.

이중섭 화가는 아들만 셋을 두었다.

태현이와 태성이 말고 원래 큰아들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런데 그 첫째 아이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전에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첫째 아이가 이름을 지어주기 전에 죽자 이중섭 화가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아들의 장례식이 시작이 되자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인 구상 시인은 친구의 아들을 애도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러나 이중섭 화가는 너무 슬퍼서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조문을 거절하였다.

구상 시인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는데 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걸어 잠그고 몇 시간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나오지 않자 구상 시인은 이 친구가 지금 술에 취해서 잠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어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그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중섭아! 너 도대체 뭐 하는 거니?"라고 묻자,

"내 아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친구가 한 명도 없구나."

이중섭 화가는 저 세상에 홀로 가는 아들이 혼자 외로울까 걱정이 되어 아들의 친구들을 그려주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이중섭 화가의 시그니처 작품이었던 '소'와 더불어 또 다른 시그니처인 '금동화'를 그리게 된다.


금동화에는 특징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옷을 입지 않은 사내아이를 그렸다.

'왜 그럴까?'

이름도 지어주기 전에 죽어버린 아들의 친구들을 그렸기 때문에 옷을 입지 않은 사내아이들을 그린 것이다.

당시에 죽은 큰 아들은 옷을 입지 않고 베네저고리만 걸치고 있는 작은 갓난아기였기 때문이다.

큰 아들의 친구들도 벌거벗은 사내아이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중섭 화가는 이러한 의미로 '군동화'많이 그리게 된다.

이때가 이중섭 화가에게는 너무나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는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지게 된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광복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광복은 오로지 우리 힘만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고, 열강에 의한 광복이었기에 나라는 힘이 없었다.

이에 독립과 동시에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듬해 바로 남북에서는 단일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중섭 화가가의 고향, 원산에 38선이 생긴다.

모든 공산당 정권은 정부가 수립되고 나면 첫 번째로 하는 일이 바로 '토지 개혁'이었다.

나라에서 모든 토지를 다 몰수해서 가난한 소작농에게 땅을 전부 나눠주었다.

이중섭 아버지는 천석꾼으로 가지고 있는 땅만 아버지 댁이 20만 평, 형 댁이 30만 평이었다.

그 많던 땅을 나라에서 몽땅 뺏어가 버린다.

이때부터 이중섭 화가의 집안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사실 토지 개혁이 처음 이루어졌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집안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집안이 땅을 뺏겼다고 쓰러질 만한 그런 집안은 아니었다.

당시 형 이중석이 가지고 있었던 재산만 이 정도였다.



땅은 뺏겼지만 백화점도 있었고, 주변에 3천억 원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백화점을 소유한 집안이었다.

백화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부자였다는 것이다.

원산 시민들의 말에 따르면, '원산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이중섭 화가의 집안 땅을 밟지 않고서는 이동이 불가능할 지경이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이중섭 화가의 집안은 원산 최고 부자였다.

당시 100평이 넘는 기와집만 원산 시내에 수십 채가 있었다고 한다.

이중섭 화가의 형, 이중석은 조선 100대 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워낙 부자다 보니 땅을 뺏겼을 때 집안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집안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땅을 뺏기고 이듬해 사건이 터졌다.

, 이중석이 공산당에 끌려가서 악덕 부르주아이자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즉결 처형을 당한다.

그와 동시에 이 씨 집안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재산을 원산 공산당으로부터 압류당한다.

악덕 부르주아이자 친일파 가족이라는 기록 때문에 이중섭 화가도 재산을 압류당하고 만다.

그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일본인이랑 결혼까지 했으니 더 이런 누명을 쓰게 된다.


원산이라는 지역의 특징 때문이라도 이중섭 화가는 친일파일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노조가 만들어졌고, 강성 노조가 활동하고 있었던 지역이 바로 원산이었다.

만약 이중섭 화가의 집안이 정말 친일파였고, 악덕 부르주아라면 이 집안사람들은 지역주민들에게 맞아 죽었을 것이다.

이 씨 집안은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있었다.

동시에 이중섭 화가는 남쪽으로 피난 내려오기 직전까지 원산에서 예술가 협회장을 맡고 있었다.

더욱이 김일성의 초상화까지 의뢰를 받았었다.

남한과 북한을 비교할 때 북한이 유일하게 잘한 것 중의 하나가 친일파를 청산한 것이다.

북한은 친일파를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에 김일성이 독립운동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일성의 활약은 미미하였지만 독립운동가 출신이었고, 김일성이 북한에서 정권을 잡았다.

자신의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친일파랑 같이 어울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북한 정권에서 이중섭 화가에게 김일성의 초상화를 의뢰한 것이다.


이중석의 재산이 너무 많다 보니까 그 재산을 탐낸 공산당 간부들이 그에게 누명을 씌워서 즉각 없애버린 게 아닐까라고 추정을 한다.

북한도 형식적이고 허울뿐이기는 하지만 사법 제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중석은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즉각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시체도 돌려주지 않는다.

나중에 이중섭 화가가 남쪽으로 피난 갈 때 어머니께서는 형의 시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피난을 가지 않겠다고 하여 이중섭 화가의 가족들만 피난을 가게 된다.


6 25 전쟁이 발발하고 난 직후 1945년 광복 직전에 부산의 인구는 28만 명 정도였다.

광복 직후에 갑자기 부산의 인구는 거의 47만 명까지 늘어났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징용으로 끌려갔다.

그 사람들이 광복 이후에 돌아와서 자리 잡았던 곳은 바로 부산이었다.

그래서 광복 직후에 부산 인구가 확 늘어나게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일사 후퇴가 시작이 되자 전국 8도에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부산 인구는 89만 명까지 늘어났고, 당시 부산이 수용할 수 있는 인구의 한계치가 30만 명이었다.

감천문화마을은 그냥 평범한 달동네가 아니다.

요즘은 울긋불긋 예쁘게 페인트칠을 하여 '부산의 산토라니'라고 불리지만 그 당시는 공동묘지였다.

피난민들이 돈이 없어서 이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공동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 자재로는 무덤을 볼 수 있다.

그 무덤의 봉분만 파내고 합판으로 지붕을 만들고 문을 만들어 달고 대충 집으로 사용하였다.

감천문화마을 담벼락을 보면 그 당시 공동묘지라는 표시를 찾을 수 있다.


부산 감천문화마을


이중섭 화가가 부산으로 내려왔을 때 돈도 없고, 연고지도 아니어서 생활은 많이 어려웠다.

이승만 정권 때 부산으로 피난민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고 간첩도 많았다.

부산은 당시에 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군사 도시였다.

이승만 정권은 부산의 피난민들을 거제도와 부산으로 강제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부에서 피난민들을 제주도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자 이중섭 화가는 1951년 1월에 제주도로 오게 된다.

이중섭 화가는 '제주도가 부산보다는 훨씬 남쪽이니 제주도로 건너가면 부산보다는 더 따뜻하게 이 겨울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부에서는 무료로 배편을 마련해 피난민들을 제주도로 보내준다고 하여 결정하게 된다.


부산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겨울을 지내기 위해 제주도로 피난길에 오른다.

현재 제주도 서귀포에 가면 이중섭 화가가 1년간 피난생활을 했던 그의 거주지가 있다.

2002년 서귀포시에서 70년 전 실제로 머물렀던 그의 집을 완벽하게 복원하였다.

그 당시 마을의 이장님이었던 김복순 할머니가 이중섭 화가에게 방 칸을 내주어서 전가족은 방 한 칸에서 살게 된다.

전쟁 중에 누구 하나 흩어지지 않고 전가족이 함께 살게 된 것 만도 감사해하고,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하면서 제주도 생활에 행복을 만끽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화가이중섭거리

제주도는 남자들이 할 일이 없는 곳이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싶었지만 할 일이 없었다.

이중섭 화가의 그림 가운데 바닷게가 등장하는 그림만 거의 100점에 가깝다.

친구들은 왜 바닷게를 그렸느냐고 물으니까 먹을 게 없어서 바닷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바닷게에게 미안해서 그때 잡아먹은 바닷게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중섭 화가는 하찮은 미물에게도 미안한 감정을 가지는 착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도가 분명 이중섭 화가에게는 풍경은 아름답고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행복한 장소였지만 일단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다.

제주도에서 1년 정도 피난 생활을 하고 나니 아내는 폐병에 걸려서 피를 토하고, 큰아들은 영양실조에 걸려서 매일 몸이 야위어 갔다.

두 부부는 '계속 제주도에서 버티는 것이 옳은 것일까'를 고민하였다.

차라리 부산에서 그냥 버텼더라면 막노동을 해서라도 가족들을 먹여 살렸을 텐데 제주도에 들어온 게 실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다시 부산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부산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일본에서 전보가 온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았지만 이중섭 화가는 일본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전보를 숨기고 그의 아내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다.

두 번째 전보가 왔을 때는 그의 아내가 직접 전보를 받게 되어 알게 된다

두 아들의 건강도 나빠지고 있으니 최소한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아내와 아이들은 일본에 가 있는 것이 옳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만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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