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부짖는 황소 3 - 이중섭 화가

by 남궁인숙


며칠째 나는 이중섭 화가 앓이 중이다.

안타까움에 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중섭 화가는 재벌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 경제 개념을 바라는 것 자체가 조금은 욕심일 수 있었다.

TV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 나오는 경제 개념이 투철했던 송중기는 인생 2회 차로 태어났기에 경제개념이 있었지만, 이중섭 화가는 조선 최고의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서 경제개념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평생 단 한 번도 '돈 걱정'이 필요 없는 조선의 100대 부잣집 자녀였다.


그에게는 일본 유학시절에 겪은 여유 있는 집 자녀여서 생길 수 있는 일화가 있었다.

그와 함께 대학을 다니던 친구가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유학생활을 그만두고 귀국하겠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서 이중섭 화가는 당시 형에게 받았던 용돈 일부를 떼어 친구의 남은 학비를 다 내 줄 정도로 부유했다.

그는 평생 누군가한테 밥 한 끼, 술 한 잔을 얻어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늘 사기꾼이 많았다

이중섭 화가가 남쪽으로 피난 내려왔을 때도 큰 사기만 4번씩이나 당하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건너 간 이남덕 여사는 조선에 남편만 홀로 두고 와서 경제 개념 없는 남편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빨리 돈을 마련해서 남편도 일본으로 데려 오고 싶었다.

조선은 일본과 당시에 수교가 맺어있지 않아 이중섭 화가는 일본인과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적을 받지 못했다.

이남덕 여사는 일본 국적, 두 아들은 이중 국적, 그는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지만 이중섭 화가만 일본으로 함께 가지 못했다.


다행히도 이남덕 여사의 대학 동창이 도쿄의 대학로에서 큰 서점을 운영을 하고 있어서 이남덕 여사는 조선으로 책을 파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었다.

처음에 소규모로 시작하여 책이 잘 팔리자 계속 책을 팔면 큰돈을 벌어서 남편을 일본으로 데리고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업을 확장하여 더 많은 책을 팔게 된다.

한국에 있는 판매책이 결국에 책 판 돈을 모두 들고 야반도주했다.

하루아침에 이남덕 여사는 그만 3억 원 정도의 어마어마한 빚더미 위에 오르게 되어 결국 이중섭 화가를 데려오지 못했다.


이중섭 화가가 1956년 세상을 떠날 당시 아내에게 작품을 굉장히 많이 남겨주었다.

연애할 때 그린 그림엽서 90점 정도, 은지에 그린 그림을 포함하여 총 250여 점의 그림을 남겨주었다.

이중섭 화가의 작품이 이 정도로 비싸게 팔리기 시작한 것은 1971년부터였다.

사망하고 15년이 지나자 그림이 어마어마한 금액에 팔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을 갚는데 30년이나 걸렸다고 하였다.


이중섭 화가는 가족이 보고 싶어서 밀항도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하였다.

실제로 선원 여권을 만들어서 상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가족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중섭 화가는 1년 만에 가족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만에 다시 부산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돈을 한 푼도 가지고 가지 못해서 장모에게 쫓겨간다.

이중섭 화가는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돈을 벌어서 꼭 가족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 일념 하나로 이때부터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중섭 화가의 작품 대다수가 이때 그려진 것들이었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북한에서 알고 지냈던 유광렬이라고 하는 분이 찾아온다

유광렬 씨는 통영에서 미술학원을 하고 있었다.

"중섭아, 너 어차피 부산에 머무를 곳도 없으니 나와 함께 통영으로 가자. 하루에 1시간만 수업해 주면 내가 너 기본적인 생활비와 작업실을 마련해 줄게."라며 제안을 하였다.

이중섭 화가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유광열 씨와 함께 통영으로 간다.

그래서 1년여간의 이중섭 화가의 통영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욕지도 풍경

이중섭 화가 통영에 머물면서 가족들이 그리울 때마다 '서피랑 전망대'를 찾아가 바다를 내려다보며 가족을 떠올렸다.

그는 이때부터 폭풍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욕지도 풍경'이라든지 '통영 충렬사'와도 같은 풍경화가 이때 그려진 것들이다.

원래 그는 풍경화를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유광열 씨의 부탁으로 그리게 되었다.

'도원'이라는 작품 스타일들도 이때 많이 그렸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황소 시리즈'도 그렸다.

이 시절에 그렸던 작품들 가운데 '벚꽃과 새'라고 하는 작품을 완성시킨다.


벚꽃 과 새


이 작품은 이중섭 화가가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그렸던 작품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다.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날다 방금 가지에 앉은 것처럼 꽃잎이 막 떨어지고 있다.

자세히 보면 새는 시선이 우측을 향하고, 그 시선을 따라가 보면 아래쪽에는 청개구리와 나비가 자리를 잡고 있다.

꽃은 벚꽃이다.

벚꽃은 일본의 국화이자 일본을 상징하고, 청개구리와 나비는 두 아들 태현이와 태성이를 상징한다.

그는 두 아들에게 항상 '개구리 같은 놈', '나비 같은 아이'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래서 두 아들을 상징했다고 볼 수 있다.

"나도 저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서 아내가 있는 현해탄 건너편의 일본으로 찾아가 아내 품에 안겨 사랑하는 두 아들 태현이와 태성이를 바라보고 싶구나"라는 감정으로 그렸던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림을 해석하면 ' 또는 부부'라는 제목의 그림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닭 또는 부부

'닭' 또는 '부부'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암탉과 수탉이 뒤엉켜 하늘 위를 날아오르는 모습이다.

'나도 저 수탉처럼 아내 품에 안겨 저렇게 자유롭게 하늘 위를 날아가고 싶구나'라는 의미를 담아 그렸을 것이다.


이때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면 하루에 한 점씩 그림을 그린다고 쓰여 있었다.

이때 그는 가족들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렇게 그림을 그려서 드디어 1954년 초반에 통영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다.

아래 사진은 전시회장에서의 이중섭 화가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다.



통영 전시회에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다.

당시 통영 전시장에서 86점의 작품이 출품되어 그중에 54점이 팔리게 된다.

이때 그는 확신에 다.

통영에서도 작품이 이렇게 잘 팔리는데 서울에서 전시하면 큰돈 벌어서 일본에 있는 아내의 빚도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이중섭 화가는 1년 여 간을 통영에서 그림을 그린 후 전시회까지 마무리한 뒤 자신감을 갖고 서울로 향한다.

그는 진주와 부산을 거쳐서 서울로 올라가면서 친구들한테 연락을 한다.

이중섭 화가는 평생 단 한 번도 술 한잔 얻어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중섭 화가에게 돈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벌떼처럼 주변에 지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중섭아, 술 한 잔만 사줘라"

"중섭아, 밥 한 끼만 사줘라"

"중섭아, 밀린 여관비 좀 내줘라"

"중섭아, 물감 좀 사줘라" 등 등

서울 올라가기 전에 진주와 부산을 다녀오면서 통영에서 번 돈을 모두 탕진하게 된다.


이때를 유광렬 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 돈 모아서 일본 갈 여비를 마련해야지 그 돈 써버리면 어떡하냐"라고 했더니 이중섭 화가는

"서울 가서 전시회 한 번만 하면 다시 큰돈 벌 수 있어. 하지만 저 사람들은 지금 당장 굶어 죽게 생겼잖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에 미술계는 전시장에서 그림이 팔리면 작품대금은 후불로 받는 구조였다.

이중섭 화가가 제일 힘들어했던 게 돈 받으러 다니는 것이었다.

통영에 있을 때는 전시장에서 그림이 팔리면 유광렬 씨가 돈을 받아다 주었다.

유광렬 씨는 이중섭 화가의 돈을 끝까지 관리 못해준 것을 후회하였다.

그 돈을 자기가 관리해 줬더라면 서울 가서 그렇게 빨리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를 하였다.


아무튼 이중섭 화가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통영 시절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전시회가 될 것이라고 믿고 서울 전시회를 위해 상경하였다.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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