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부짖는 황소 5 - 이중섭 화가

by 남궁인숙

이중섭 화가의 서울 생활은 어려웠다.

생활비도 넉넉하지 않았고 캔버스를 마음껏 구입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은지에 자주그림을 그렸다.

은지에다가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 '은지화'라고 불렀다.

담배 케이스 안을 보면 은지로 담배를 보호하고 있는데 그 은지를 걷어내어 은지 위에 그린 그림이다.

이중섭 화가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독자적인 분야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간단하였다.

담배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은지를 펼쳐서 날카로운 송곳으로 윤곽선을 눌러 밑그림을 그린 후, 두 번은 할 수 없으므로 단번에 쭉쭉 빠르게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물감이나 먹물 등을 솜에 묻혀서 문질러서 완성시킨다.

은박지의 광택과 음각선에 묻혀 들어간 짙은 선은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한 상감기법을 연상시켰다.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다방이나 술집 등 길바닥의 쓰레기통까지 뒤져서 담뱃갑을 주워 그 안에 들어있는 은박지를 사용했고, 종이의 찢어진 부분이나 구겨진 부분들도 그대로 살려서 화면의 유연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은지화

이중섭 화가가 은지에다가 그리는 그림 대부분의 테마는 '군동화'였다.

이중섭 화가가 군동화를 그리는 이유는 아들에 대한 애도였다고 말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의 친구를 그려준 것이기에 아이들이 모두 벌거벗고 있고, 성기를 드러내고 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문화부 고위관계자라는 사실만 밝혀져 있는데 이중섭 화가의 개인전을 보러 왔다.

그는 은지화들을 보더니 성기가 적나라게 드러나 있는 퇴폐적인 '춘화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전시회는 '춘화 전시회'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강제로 철거 명령을 내린다.

전시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춘화 전시회'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당연히 전시회는 흥행을 할 수 없었고, 작품은 제대로 팔리지도 않았다.

문제는 작품을 샀던 사람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작품을 가지고 간 이후에 돈을 받으러 갔더니 돈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

가뜩이나 이중섭 화가는 돈 받으러 가는 것을 무척 힘들어했는데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을까?

또한 춘화 전시회였다고 하면서 작품을 구입한 사람들이 돈을 제대로 주려고 하지 않았다.

작품 값을 깎으려고 했고. 몇 작품을 팔았지만 액자값도 나오지 않았다.

전시회 대관비를 내고 나니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그는 전시회가 끝나면 큰돈 벌어서 일본을 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큰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이때 이중섭 화가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당시 이중섭 화가가 절망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구상 시인에게 급하게 연락이 왔다.

구상 시인은 이중섭 화가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를 위해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는 직장을 소개해 주기도 하였다.

"중섭아! 너 아직 작품들은 남아있으니 서울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뿐이니 작품을 들고 대구로 내려오너라. 대구에 와서 전시회 한 번만 더 해보자"라고 권하였다.

그렇게 이중섭 화가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대구로 내려갔다.

그리고 현재의 대구 문학관인 건물에서 2번째 개인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지만 급하게 열었던 전시회가 잘 알려지지도 않아서 관람객이 모이지 않았다.



오른쪽 사진은 당시 대구 전시회장에서의 이중섭 화가의 모습이었다.

1년 전 왼쪽 통영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보면 1년 만에 사람이 너무 많이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통영에서 그 자신감 넘치던 이중섭 화가의 여유로운 모습과 절망에 빠져서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대구에서의 모습이었다.

통영에서 그 자신감 넘치던 이중섭 화가의 여유로운 모습과 절망에 빠진 모든 것이 대조적이다.

대구 전시장에 관람객이 모이지 않았고 전시회는 실패로 돌아갔다.


구상 시인은 이중섭 화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중섭 화가는 1954년부터 1년 반 정도를 구상 시인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이때 이중섭 화가는 친구에게 '친구 구상의 가족'이라는 그림을 그려 주었다.


친구 구상의 가족, 1955

이 그림이 바로 이중섭 화가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친구 구상의 가족'이다.

당시 구상 시인은 대구일보의 논설위원이었고, 아내는 의사였다.

구상 시인의 집안은 먹고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던 여유로운 집안이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상 시인은 그 비싼 자전거를 사서 아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구상 시인이 아들에게 세발자전거를 사다 주던 날 그린 그림이었다.

세발자전거를 타면서 즐거워하는 아들과 구상 시인의 모습, 그리고 옆에는 아내와 딸처럼 보이는 아이가 미소 짓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측 편에 보면 평상 위에 앉아 구상 시인의 행복해하는 가족의 모습을 멍하니 초점도 없이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중섭 화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 속의 표정들이 서로 반대였다.

자전거를 타는 소년에게 손을 뻗어보지만 힘들어 보인다.

이중섭 화가만 제외하고 모두 행복한 표정이다.


'이 그림에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

그림 속에서 이중섭 화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떤 감정일지 충분히 느껴지고 애잔함이 밀려온다.

그리고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가슴이 아려온다.

그는 "우리 태성이에게 자전거 사주기로 약속했는데....."

"나도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서 우리 태성이 저렇게 자전거 태워줘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강, 1956


'돌아오지 않는 강'을 보면

'저 흘러가 버린 강물처럼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은 절대로 해결되지 않을 거야.

나는 두 번 다시는 사랑하는 내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야.'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때부터 자포자기해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이중섭 화가는 결국 거식증까지 걸린다.

음식을 먹지 못하고, 술만 마시기 시작한다.

이대로 두면 건강이 더 나빠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구상 시인은 친구들에게 연락을 한다.

내가 생활비 다 지원해 줄 테니까 제발 누가 중섭이와 함께 그림 좀 그려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래도 그림이라도 그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상 시인은 북한산 정릉 계곡 인근에 집을 하나 짓는다.

그리고 이중섭 화가를 친구들과 함께 이곳으로 보내 그림을 그리게 하는데, 이곳을 찾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달 증상이 일어나고 감염으로 쓰러진다.

친구들은 급히 이중섭 화가를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리고 이중섭 화가는 끝으로 이곳에서 입원 치료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당시 병원에서 연락할 곳이 없어서 사망하고 난 이후 이틀 동안 아무도 이중섭 화가가 죽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친구였던 김인석 작가가 우연히 병원 근처를 지나다가 병문안을 갔다가 이중섭 화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대구에 있는 구상 시인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날 저녁 구상 시인은 급히 서울로 상경을 한다.

병원 앞에 도착을 하고 발걸음을 잠깐 멈추었다.

영안실은 지하 1층에 있었지만 이중섭 화가는 311호실이 입원실이었다.

구상 시인은 그가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맞이해 줄 것만 같아서 311호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밀릴 병원 고지서만 놓여 있었다고 전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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