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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새작가 Apr 14. 2024

시제 모시는 날

 매년 4월 둘째 주 토요일은 '시제 모시는 날'로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정해 놓은 날이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시간을 내어 오늘만큼은 잊지 않고 고향방문한다.

나는 익산역까지 기차를 타고 다.

세종시에 사는  조카는 내가 기차를 타고 온다는 것을 알고서 익산역에서 기다려주었다.

서울에서 김제 만경까지 운전해서 가는 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시제 모시는 날엔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시절이 좋아져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만 가도착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자동차로 운전해서 4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익산역에서 고향집으로 가는 도중에 능제 옆에 있는 '만경초등학교' 앞을 지나갔다.

그때는 학교가 커 보였는데 지금 보니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나는 차에서 내려서 교정을 사진에 담았다.

지금은 학생이 한 학년에 1, 2명씩 밖에 없다고 하였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한 학년에 여러 반 씩 60 명도 넘게 있었는데 지금은 시골에 젊은 인구가 없으니 아이들이 거의 없다고 다.

잠시 교정을 바라보며 운동장에서 아침조회를 했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렸다.

'저 운동장에서 체육도 했고, 달리기도 하고, 미끄럼틀, 지구본, 그네를 타고 놀았었지......'

우리 때는 흙먼지가 폴폴 나던 운동장에 초록 잔디가 깔려있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추억해 보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만경향교'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차를 세우고 향교 주변을 둘러보면서 아버지를 생각했다.

매주 일요일 오전이면 아버지의 주옥같은 훈화가 저 안에서 들려왔었다.

충, 효, 예, 지

아버지께서 소중히 여기며 가르치셨던 사자소학,

논어, 맹자, 공자의 가르침이 있다.



  아버지는 1남 6녀의 종갓집 종손으로 태어났다.

학교 1학년 때, 양친을 여의고 3명의 누이를 결혼시켰다.

그들의 형제애는 말할 게 없었다.


 나는 유난히 필력이 뛰어났던 아버지의 글씨를 좋아했었다.

 아들에게 비문에 새길 글과 비를 세울 때 쓰일 공사대금을 별도로 맡기셨세상 깔끔한 성정을 지닌 아버지셨다.

손주 용돈을 줄 때도 항상 흰 봉투에  "할아버지 장학금"이라고 써서 주셨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원했던 대로 글자 한 개도 놓치지 않고 비석에 모두 새겼다.


 

 고항집도착하여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안이 고요하고 정갈했다.

내가 예닐곱 살 때 선산의 소나무를  베어다 지은 기와집이었다.

기와지붕 위의 망와가 아직도 위엄 있어 보였다.

나는 우리 집 상량을 올리던 날을 기억한다.

상량제를 지냈었다.

어른 몸통 굵기의 대들보와 기와지붕 처마에 질서 정연한 서까래가 아직도 튼실하게 보였다.

방과 방 사이에는 대청마루가 있고, 옆으로 부엌이 있다.

우물을 지나면 행랑채가 있고. 곳간을 지나서 사랑방이 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선산의 소나무에 의지해서 집을 지었던 것이다.

집을 짓고나서부터 살림이 폈다고 했다.

부엌의 대들보가 반듯하지 않다고 어머니는  늘 잔소리를 하셨다.


 간 문을 활짝 열어 둔 건 겨우내 눅눅했던 실내를 봄바람으로 건조하기 위함   같다.

방문마다 창호지는 바래고 찢어져 있었다.

릴 때는 창호지문이 해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창호지문에 구멍을 내어 밖을 내다보곤 했었다.

어머니는 추석이 다가올 때쯤 빛바랜 창호지문을 뜯어내고 다시 붙이셨다.

손잡이 옆, 손이 자주 닿는 곳에는 말린 꽃잎을 넣어 모양을 내고 도톰하게 창호지를 한 겹 더 붙였다. 

오랜만에 고향집에 와보니 모든 게 사무치게 그리웠다.


 화단에는 수선화가 피었다가 지고 있었

청개구리 한 마리가 화단에서 폴짝 뛰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재바르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놀라서 도망친다.



 뒤꼍으로 돌아가보니 감나무 옆 장독대가 정겹다.

그동안 장독대의 항아리 개수가 많이 다.

"그 많던 종갓집 장독대의 항아리들은 어디로  갔을까?"

가장 큰 씨간장 항아리는 아버지 살아계실 때 누군가에게 팔았다고 했다.

그때는 사용하던 항아리를 사가는 분들이 많았다.

자잘한 항아리들만 남이서 장독대의 명분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만간에 저 항아리들도 사라질 것이다.


 뒤꼍 대나무 밭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대나무 밭도 기억 속 대나무밭보다는 작아 보였다.

어릴 때는 저 대나무 밭이 너무 무서웠다. 

특히 비바람 부는 밤에는 더욱 무서워서 이불밖으로 얼굴도 못 내밀었다.



  담장이 허어져 기고 있다.

허물어진 담장 너머로 옆집에 세 들어 사는 중년의 부부가 봄맞이 중인 듯 뒤뜰에 있는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지게차를 운전하는 분인데, 일이 없을 때는 저렇게 집안일을 돌본다고 한다.

시골에 이사 와서 사는 중년부부의 모습이 정다워 보였다.


 앞에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선산 한편에 소나무를 심기 위해  땅을 빌려 쓰시는 분이 풀을 베어 놓아서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이번 시제가 음식을 상에 올리는 제사로는 마지막이라고 했다.

오라버니는 축문을 읽으면서 열네 분의 조상님께 미리 고백을 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내년에는 과일과 포만 놓고 약식으로 간단하게 제사를 지낼 테니 양해해 주시라고 하였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남겨진 음식들은 처치곤란이었다.

 옛날 종갓집인 우리 집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나면 삼십 여 분의 동네어르신들을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했었다.

이젠 모든 게 추억이 되었지만 생각할수록 종가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 일들을 해 내신 아버지가 더욱 존경스러웠다.

 아버지께서 심어놓은 산소 홍매화는 시제모시는 날이 되면 우리 가족들을 환하게 맞이해 주었다.



 한 시간 동안 제사를 지낸 후, 산소   핀 예쁜 야생화에 눈길이 갔다.

야생화는 언제 봐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날 좋은 4월에 년 중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를 느낀다.

조상님들이여!

앞으로 약식으로 제사를 모시더라도 우리 형제들 모두 화목하고, 건강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늘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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