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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새작가 Jul 24. 2024

무사시보 벤케이 동상

 교토에서 다음날 아침, 호텔 조식을 배불리 먹고 절벽 위에 세워진 청수사(Kiyomizu-dera)관광을 나섰다.

교토에서 인기 있는 관광지 중의 하나로 알려진 청수사는 단어의 뜻 그대로 '물이 맑은 절'이라고 한다.

교토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천수관음을 모시는 청수사의 본당은 험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신기한 모습은 본당의 난간이 172개의 나무 기둥이 떠받치면서 벼랑에서 약 10cm 정도 돌출되어 튀어나와 있었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이해가 되었다.

참배자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돌출시켜 확장을 한 것이다.



  청수사는 780년에 나라(奈良)에서 건너온 승려 엔친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청수사의 원래 주인이었던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임신한 아내를 위해 보양식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사슴 사냥을 나섰다가 산에서 천수관음상을 모시고 수행 중이던 엔친 스님을 만나면서 사슴 사냥을 한 것에 대해 뉘우치면서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후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관음보살에 귀의하고자 자기가 살던 집을 내놓았으며, 엔친 스님에 의해 관음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본당 옆 건물에는 공사 중인 건물이 있는데 지붕 교체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붕을 교체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노송나무의 껍질을 얇게 저며서 켜켜이 쌓아 붙여 지붕을 잇는 작업이라고 한다.

지붕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질감이 특징인데 기와를 사용하면 수명이 길지만 노송나무는 비바람에 부식되어 자주 지붕을 교체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기와보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노송나무를 지붕의 재료로 많이 사용한다.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못을 사용하므로 기둥에 못을 사용하지 않는 특징을 가졌다.


 폭포에서 세 갈래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나오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각 각의 물줄기는 건강과 사랑, 학문을 뜻한다고 한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실제로 영험한 물은 아니고, 가이드들이 설명을 하면서 스토리에 약간의 MSG를 쳐서 그냥 재미있게 설명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세 갈래의 물줄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영험하다고 믿고, 가이드가 분명하게 그냥 지어낸 이야기라고 했음에도 우리는 좋은 물일 것이라 여기면서 물을 마시면서 소원을 빌기 위해 긴 행렬에 합류하였다.

나도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처럼,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서 한 모금 입에 대어 보았다.

그냥 물 맛이었다. ㅎㅎ

푸른 나무와 주홍빛 단청을 가진 사찰이 잘 어우러진 멋진 절이었다.



 청수사를 관광하고서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로 진입하였다.

버스 안에서 도로에 세워진 '미나모토 요시츠네와 무사시보 벤케이'의 우스꽝스러운 하의 실종의 동상을 보았다.

가이드의 짧은 설명으로는 동상에 대해 자세히 알기 어려웠다.

왜 하의를 입히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하니 가이드는 그냥 무사시보 벤케이를 재미있게 풍자한 것이라고 다.

나는 '무사시보 벤케이'가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무사시보 벤케이는 무술 실력이 뛰어났던 설화 속의 승려였다.

어릴 때 '오나카와(鬼若)'라는 이름을 가진 히에이잔(比叡山) 소속의 승려였으나 성격이 난폭하여 히에이잔(比叡山)에서 파문을 당하였다.

떠돌이 무사로 지내다가 어느 날 괴물이 잉어로 변하 바다를 지나가는 사람들잡아먹는다는 소문을 듣고, 그 마을에 가서 잉어로 변한 괴물을 손으로 때려잡는다.

이후에 비로소 '오나카와'라는 이름 대신에 '무사시보 벤케이(武藏坊弁慶)'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 인물인 ‘무사시보 벤케이(武藏坊弁慶)’는 일본인들에게 난폭하지만 용맹함의 대명사로 통하였다.


그림출처 -https://blog.naver.com/hszzang9721/220283460432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무사시보 벤케이(武藏坊弁慶)는 교토 고조 오하시에 버티고 서서 다리를 지나가는 무사들을 상대로 결전을 벌여 검을 빼앗았다.

왜냐하면 검을 결투의 전리품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무사의 검을 무려 999개를 빼앗게 되자, 한 개만 더 모으면 천하제일의 무술실력자가 된다.

그날을 위해 벤케이는 다리 위에서 검 결투를 벌이기 위해 상대무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고조 다리 위로 호리호리한 몸의 젊은 남자가 허리에 칼을 차고서 피리를 불며 다가왔다.

벤케이는 그의 검을 빼앗으려고 큰 칼을 휘두르며 겁을 주었다.

상대무사는 부채를 던지며 잽싸게 난간 위로 뛰어올라 빛의 속도로 벤케이가 휘두르는 칼을 피하면서 마치 벤케이를 조롱하듯이 날렵하게 피해 갔다.

벤케이는 상대무사가 자기보다 무술 실력이 한 수 위임을 느끼면서 곧장 무릎을 꿇고 상대무사에게 굴복하면서 그의 충직한 신하가 되기를 자처하였다.

무예가 뛰어난 날쌘돌이는 바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였다.     

무사시보 벤케이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따르며 타고난 괴력과 무예, 지략으로 전투에 참가하면서 요시츠네의 연전연승에 일조를 하게 된다.

이후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이복형이었던 요리토모와 권력다툼을 벌이다가 요리모토에게 쫓기게 되자 요시츠네를 따랐으며, 오슈에서 후지와라노 야스히라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처하자 끝까지 요시츠네를 지키면서 코로모가와 전투(衣川の合戰)에서 수많은 화살을 온몸에 맞으며 벌집이 되어 서있는 자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 '분을 이기지 못해 선 채로 두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는 일화로 무사시보 벤케이는 강함과 용맹함을 갖춘 주인공이 되었다.

탄생이야기보다 죽음이 더 유명하게 전해지면서 강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무사시보 벤케이의 탄생 설화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후세에게 전해진 그의 탄생과 죽음은 대부분 각색된 것들이었다.

쿠마노 벳토우(熊野別當) 가의 적자로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무려 19개월 만에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몸집은 두세 살 정도였으며, 머리카락은 어깨를 덮을 정도로 길고, 이빨도 모두 나있었다고 한다.

쿠마노 벳토우(熊野別當) 가는 신앙을 주관하는 일을 했으며 벤케이의 아버지는 그곳의 장으로서 상당한 권세를 자랑하였다.

그의 아버지, 쿠마노 벳토우(熊野別當)는 귀신의 자식을 낳았다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자, 벤케이의 숙모가 데려가서 '오니와카(鬼若)'라는 이름으로 교토에서 자랐다.

그의 숙모는 그를 일본 불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히에이잔(比叡山)의 승려로 키웠다.

쿠마노 수군을 이끄는 후지와라노 탄조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고, 고승 탄조(湛増)가 다이나곤(大納言)의 딸을 겁탈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벤케이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연관된 부분 말고는 알려진 바가 없으므로 허구의 설화라고 믿었다.

그러나 역사서에 나오는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오늘날 무사시보 벤케이는 타투의 인기 있는 주인공, 만화영화의 주인공, 여러 다양한 캐릭터로 사용되면서 일본인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대중매체에서는 힘을 쓰는 존재로 부각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 속담에 무사시보  벤케이의 이름에 빗대어 '집안의 벤케이'라는 속담이 있다.

'집에서는 벤케이처럼 용감하지만, 밖에 나가서는 매우 나약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집안에서는 아이들이나 아내에게 큰소리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 속담의 '방안의 퉁소'와 비슷한 의미인 것 같다.

교토거리에서 만난 우스꽝스러운 무사시보 벤케이의 동상을 보고서 찾아본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동상의 귀여운 모습처럼 오늘날 벤케이는 무척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to be continude osa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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