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폴 세잔에 꽂혀 전영백 교수가 집필한 현대 사상가들의 세잔 읽기, '세잔의 사과'를 읽고 있다.
폴 세잔의 그림에서 무관심의 실체를 우울과 연관 짓고 있는 부분에서 멈춰있다.
'세잔의 사과'는 단순한 미술 감상서를 넘어서 철학적·심리학적 시선으로 세잔의 그림을 해석할 수 있게 아주 유익하게 잘 쓰여 있다.
전영백 교수님의 책은, 단순한 미술 해설서가 아니라 깊은 사유를 자극하는 지적 탐험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교수님의 시선은 그림 너머에 숨어 있는 철학적, 역사적 맥락을 통찰력 있게 풀어냈다.
독자가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읽고 해석하게' 만들었다.
책 곳곳에 드러나는 저자의 언어는 세잔의 그림에서 인간의 내면을, 색채의 변주 속에서 무관심의 실체를 포착해 냈다.
예술을 지적인 사유와 감성의 만남의 장으로 끌어올려주기에 이 책은 ‘좋은 책’ 그 이상이다.
책을 읽는 내내, 전영백 교수님의 지적 수준과 미학적 감수성이 만들어내는 밀도 높은 문장들 덕분에, 미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본다.
세잔의 ‘무관심처럼 보이는 시선’이 실은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유대계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이 한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은 인간 감정의 핵심을 찌른다.
미움에는 아직 감정의 불꽃이 남아 있다.
하지만 무관심은 그것마저 사라진, 공기처럼 존재하지만 생기를 앗아가는 감정이다.
그래서 무관심은 때로 사랑보다 더 큰 고통을 안긴다.
그렇다면 '무관심'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감정의 ‘회피’나 ‘단절’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예술은 이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말한다.
무관심은 내면의 '우울'이 외부 세계에 드러나는 방식이다.
즉,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 감정, 의미를 잃은 시선, 그리고 그 속에서 멈춰 버린 시간의 흔적이다.
폴 세잔(Paul Cézanne)은 정물화에서 수많은 사과를 그렸다.
그 사과들은 가지런히 놓여 있지도 않고, 관능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질서 속의 혼란처럼 배치되어 있다.
그림 속 사과는 마치 말을 걸지 않는다.
아무것도 호소하지 않고, 감정을 유보한다.
마치 그것은 세상의 무관심을 받아들인 존재처럼 보인다.
전영백 교수는 '세잔의 사과'(문학과 지성사, 2007)에서 세잔의 그림을 읽는 현대 사상가들의 사유를 소개하며, 세잔이 단순한 정물화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다가갔다고 말한다.
색채는 생기를 띠기보다는 절제되어 있고, 형태는 명확하되 단절되어 있다.
세잔은 모든 감정을 내려놓은 채, 오로지 ‘보는 행위’ 자체에 천착한다.
사랑도 미움도 아닌, 그저 응시한다.
그의 붓끝은 열정이 아니라 침묵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우울의 미학’이었다.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대신, 그저 존재하게 두는 것.
세잔은 사과와 테이블, 병과 식탁보, 그리고 그 사이의 어긋난 각도를 통해 이 무관심의 실체를 그렸다.
그것은 분노나 절망보다도 더 깊은 내면, 즉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 모든 감정의 진공 상태를 암시한다.
그림을 보는 우리는 어쩌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감정이 결핍된 장면은 관람자를 밀어낸다.
하지만 그 속을 오래 들여다보면, 세잔이 말하고자 한 것,
‘느끼지 못함’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더 이상 감정을 줄 수 없는 상태, 즉 우울이 만든 무표정이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 그리고 그 무관심의 깊은 뿌리는 우울이다.
세잔은 그것을 사과와 정물로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은 소리 없이 말한다.
우리가 얼마나 감정에서 멀어져 있는지를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다시 사랑을 꿈꿀 수 있는 여백을 남긴다.
참고 - 전영백, 『세잔의 사과: 현대 사상가들의 세잔 읽기』, 문학과 지성사, 2007.
※엘리 위젤(Elie Wiesel)은 루마니아 태생의 미국 유대계 작가이자 교수,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권과 평화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권유로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 『밤(Night)』을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