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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나를 사랑한 자

by 남궁인숙

심리학에서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는 다시 우리를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Narcissus)'를 소환한다.

맑은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해 결국 빠져 죽는 나르키소스의 이야기.

이 짧고 비극적인 신화는 오늘날 자아의 과잉과 자기애의 병리적 성향을 가장 강렬하게 상징한다.

프로이트는 '자기애에 관한 서설(1914)'에서 나르시시즘을 인간 발달의 한 단계로 설명하였다.

오늘 수업에서 학생들과 토의할 내용이기에 먼저 '나르시시즘'에 관해 공부해 보았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며, 그것은 생존을 위한 자기 보존적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자기애가 지나치게 고착되면, 타인을 사랑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병적 자기애로 발전하게 된다고 했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거절하고,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했다.

결국 그는 벌을 받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고, 타인의 사랑을 거절한 만큼 자기 사랑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는 자기를 보지만, 자기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실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더 가까이 다가가다 끝내 파멸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나르키소스의 그림자를 본다.

끊임없이 자신을 피력하고, ‘좋아요’와 ‘조회수’로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자기 불안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인정받지 못할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숨어 있다.
이는 곧, 나를 들여다보는 시선이 타인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타인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자신마저 고립시키는 역설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게 문제 되는 순간은,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타인을 도구화하거나, 무시하게 될 때이다.
진짜 자기애란,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되, 타인 또한 그만큼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거울 속 나르키소스를 바라보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가? 그 시선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가두고 있는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단순한 병적 성격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발달 단계라고 설명했다.

우리 모두 유년 시절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모두 자신밖에 모르던 시기, 즉 모든 관심과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향했던 시기를 겪는다.

이를 프로이트는 '1차적 자기애(Primary Narcissism)'라고 불렀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도 계속해서 사랑을 받기만 하려 하고,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 채 ‘나만 특별하다’고 느끼는 상태에 머물면, 그것은 '2차적 자기애(Secondary Narcissism)'가 되어 병적인 자기 중심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자기애'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성장을 통해 ‘나’만 보던 시선이 ‘타인’에게도 향할 때 비로소 건강해진다.



자크 라캉은 '거울 단계(mirror stage)'라는 개념으로 나르시시즘을 독특하게 해석했다.

아기는 생후 6개월쯤 거울을 보며 자신과 처음 마주친다.

아직 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시기지만,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아, 저게 나였구나!' 하고 인식하게 된다.

이때 생기는 '나'에 대한 인식은 사실 진짜 나와는 다른 이미지, 즉 완성되고 조화로워 보이는 환상 속의 나였던 것이다.

이 ‘거울 속 이미지’를 이상화하며 우리는 늘 ‘그런 나’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기들은 거울 속에 비친 나를 좋아한다.

문제는 현실의 나는 언제나 부족하고 어설프기에, 이 ‘이상적인 나’와의 간극에서 불안이 생기고, 끊임없이 비교하고 채우려 하며, 불완전한 자기를 부정하는 심리가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완벽한 나'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그것이 주는 상처까지 포함하고 있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사랑한다.

그는 그것이 자기 자신인 줄도 모르고, 다가가려 할수록 더 멀어지고, 결국 그 사랑에 빠져 자기 자신과도 연결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이 모습은 오늘날 자기애적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많이도 닮아 있다.
SNS에서 필터를 씌운 자아, 비교 속에서 자존감을 잃는 사람들, ‘좋아요’에 목매는 감정 등은 모두 어떤 면에서 거울에 갇힌 나르키소스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나르시시즘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타인을 밀어내고, 현실의 나를 부정하며, 이상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외롭고 불안한 ‘거울 속 인간’이 될 것이다.

진짜 치유는 거울 속 이미지에서 시선을 떼고, 나와 타인을 함께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자기 이해와 성찰의 과정이다.

자신의 성격, 가치관, 경험 등을 고려하여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도전적인 성향을 가졌다면 '모험가', 창의적이라면 '혁신가'와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다가 갈 것이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태도로 세상 속에서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면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나가는 일일 것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에코와 나르키소스' (1903년)


이 작품은 현재 영국 리버풀의 워커 아트 갤러리(Walker Art Gallery)에 소장되어 있는 영국의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에코와 나르키소스(1903)'다.

이 작품은 에코가 나르키소스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장면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워터하우스는 에코의 시선을 통해 그녀의 사랑과 슬픔을 표현하였으며,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몰두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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