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플라인 광화문역 8번 출구를 숨 가쁘게 빠져나왔다.
강의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교보문고 워켄드 아크홀로 향했다.
입장 가능 시간이 지나면 인터미션까지 기다려야 하기에 발걸음을 서둘렀지만, 결국 5분이 늦어 입장은 불가했다.
하는 수 없이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 삼각김밥 하나를 사서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 후, 강의가 재개되었고 나는 조용히 그 안으로 들어섰다.
강의의 주제는 〈사랑과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피카소의 여인들이 있었다.
그중의 눈에 띄는 여인, '도라 마르'가 있었다.
도라 마르(Dora Maar)의 본명은 앙리엣 마르트였다.
그녀는 사진작가였고, 초현실주의 예술가였으며 무엇보다 피카소의 연인이었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고전적 서구 미인의 전형처럼 보였다.
길게 늘어진 눈매, 날렵한 콧날, 감정을 머금은 단정한 입술.
그러나 그녀는 단지 ‘아름다운 여인’에 머무르지 않았다.
지적이었고, 독립적이었으며, 자신만의 언어로 예술을 구축해 가던 창작자였다.
그녀는 스스로 카메라를 들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피카소 앞에서는, 모델이 되어야 했다.
피카소는 그녀의 얼굴을 해체했다.
1937년, 피카소는 도라 마르를 모델로 '우는 여인'을 그렸다.
쪼개고, 왜곡하고, 붙여서, 마침내 ‘피카소의 도라 마르’를 탄생시켰다.
그림 속 도라는 더 이상 고전적 미인이 아니었다.
분열된 선, 비명 같은 색채, 일그러진 표정, 그것은 고통과 광기, 사랑과 파괴가 얽힌 복합적 얼굴이었다.
피카소는 “도라 마르는 고통을 앓는 여인의 얼굴을 가졌다. 그녀를 그릴 때면 나는 울고 있는 여인으로밖에 그릴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도라 마르는 실제로도 잘 울었다고 한다.
사랑은 그녀를 예민하게 만들었고, 점점 병들게 했다.
피카소는 그녀의 눈물에서 예술을 길어 올렸지만, 그녀는 진짜 눈물을 삼키며 무너져갔다.
하지만, 도라 마르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피카소가 그녀의 얼굴을 찢었을지언정, 그녀는 잔해 속에서도 스스로의 예술을 이어갔다.
붓을 놓은 피카소의 뒤에서, 그녀는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광기와 통곡의 여인이 아니라, 고요한 주체로서.
도라 마르는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침묵은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그림 속에서 울었지만, 내 삶에서는 끝내 울지 않았다.”라고.
'우는 여인'은 단지 도라 마르의 초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상처 입고 해체된 수많은 여성들의 얼굴이며, 예술가의 영감이라는 이름으로 침묵을 강요당한 존재들의 잊힌 이름이었다.
당시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마리 테레즈는 그에게 순수와 따뜻함을, 도라 마르는 지성과 격정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도라 마르의 눈물은 피카소 개인의 비극을 넘어,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과 사랑의 이면을 함께 상징했다.
같은 해에 완성된 '게르니카'와 '우는 여인'은 감정의 연속선 위에 있다.
두 그림 모두 피카소의 가장 깊은 비명을 담고 있다.
피카소는 감정을 구조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예술가였다.
그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한 여인의 고통뿐 아니라, 그 고통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순된 사랑까지 읽어낸다.
그렇기에 '우는 여인'은 피카소의 감정이자, 도라 마르가 끝내 말하지 못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것은 미술사 속에 남은 '슬픔의 초상'이며, 여성의 주체가 겪는 '해체와 회복'의 과정이었다.
그 이후, 그녀는 피카소의 그림에서 사라졌다.
1945년, 피카소는 도라 마르를 떠났다.
새로운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가 그의 곁에 등장하면서, 도라는 뒤로 밀려났다.
남은 것은 피카소가 준 집 한 채와, 더 이상 자신을 그리지 않는 화가의 뒷모습이었다.
사랑이 끝난 뒤, 도라 마르는 어두운 터널 속을 걷게 되었다.
우울증, 전기 충격 요법, 정신분석 치료 등을 받게 되며, 예술계에서도 외면당했고, 그녀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의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사랑과 예술이 남긴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말년에 도라 마르는 “피카소 이후에는 오직 신뿐이다.”라고 말한다.
세속의 사랑을 지나, 그녀는 신에게 귀의했다.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았고, 더 이상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찾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조용히 물러나 그림을 그리고, 미사에 다녔다.
이웃들은 “미사에 갈 때 말고는 도라 마르를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도라 마르는 한 남자의 그림 속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고통을 견디고, 자기만의 세계를 다시 그려나간 여성 예술가였다.
그리고 '우는 여인'은 피카소의 그림이자, 도라 마르가 끝내 말하지 못한 '고요한 절규'였다.
그녀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예술의 이면'과 '사랑의 뒷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강의가 끝나고 피카소에 대한 Q&A 시간에 청중들은 질문이 많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예술적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였다.
우스갯소리지만 "잘생기면 다야?"
'예술과 윤리'는 분리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일부는 예술은 창조의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삼기 때문에, 작가의 도덕성과는 별개로 작품만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은 ‘작가와 작품은 분리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예술은 인간의 삶을 반영한다
예술은 개인의 내면뿐 아니라 사회, 인간, 관계에 대한 표현이다.
예술가가 타인의 존엄을 침해하거나, 권력과 불균형한 관계를 무시하며 창작했다면, 그 행위는 예술 이전에 인간의 윤리를 어긴 것이다.
피카소는 20세기 예술의 거장이지만, 동시에 여성들과의 불균형한 관계로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우는 여인'은 예술적으로 위대하나, 그것이 도라 마르의 '실존적 고통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예술가의 책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하였다.
도라 마르는 예술적 주체였지만, 피카소 앞에선 '대상화된 뮤즈로 소비'된 것은 사실이다.
'예술은 고통을 담을 수 있지만, 타인의 고통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경계심'을 갖게 하였다.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고, 관계 속 타인을 존중하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창작의 자유와 인간성의 조화를 고려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예술가의 윤리는 단지 법적인 문제를 넘어, ‘무엇을 창작할 것인가’ 이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