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교직원 워크숍을 가다

by 남궁인숙

'사랑 나눔 가족 바자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토요일 아침, '암사모두가치공동체' 교직원들은 이천으로 워크숍을 떠났다.

어제와 다른 아주 화창한 날씨였다.

눈에 익은 일상에서 한 걸음 벗어난 우리는 걷고, 보고, 느끼는 법을 다시 배운다.

이천의 설봉공원의 초록은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는 빛이었다.


'나오니까 좋다.'


이른 여름의 공기는 조금 습했지만, 그 안엔 살아 있는 것들의 숨결이 묻어 있었다.

서로의 발걸음이 겹치며 나누는 대화 속에, 우리는 ‘일’이 아닌 ‘사람’으로 머물렀다.

그리고 잠시, 보육교사도, 원장선생님도 아닌

그저 '사람’으로 존재하는 시간의 고요함을 누렸다.

원장선생님들도 자주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교직원들은 더하겠지.......


점심을 먹고 두 번째 장소로 이동했다.

한국 미용계의 전설, 한국 최초의 남성 헤어디자이너의 철학과 삶을 들을 수 있는 '라드라비 리조트'내에 있는 '이상일 미술관'으로 향했다.

머리카락을 디자인하던 그의 손끝에서,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된 연필화는 또 다른 생명 있는 예술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은 어느 것 하나 쉽게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철선으로 엮은 조형물에는 그의 살아온 역사가 새겨져 있었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 교통사고로 침대에 누운 채 천장에 거울을 매달아 놓고, 다른 화가의 작품집을 보면서 따라서 그렸다면, 이상일 작가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기에 독학으로 그린 그의 작품에는 원근법의 규칙은 지켜지지 않았을지라도 상상과 기억의 감각으로만 아름다움이 뒤섞여 그려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예술적 창작물의 이야기를 박혁거세의 신화를 들려주듯이 설명해 주었다.


그는‘헤어디자이너’라는 용어를 한국에 처음으로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프리미엄 헤어숍 ‘헤어뉴스’를 개업하여 유명 연예인 등을 스타일링하면서 남다른 철학으로 미용예술계에 뛰어들었다.

'샤기커트'를 유행시킨 장본인이었고, 미용으로 부를 이루어, 이곳 이천에 땅을 사서 내려온 후 제3의 인생인 화가로서 활동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처음엔 패션디자이너, 다음으로 헤어디자이너, 이젠 화가의 삶이었다.

그는 내가 본 몇 안 되는 예술성을 지닌 천재였다.


이곳은 서울의 번잡함과는 다른, 고요하고 단정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이상일'이라는 인물의 철학을 처음 제대로 마주했다.

이상일은 과거 앙드레 김 패션쇼의 ‘양머리’를 만든 디자이너였다.

그는 미용을 하면서 한 사람의 얼굴형, 두상, 성격까지 읽어내면서 가위질을 했다고 한다.

미는 기계로 할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통찰로 완성된다고 한다.

고객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존재’를 '새롭게 조명하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패션 디자이너'답게 지금 입고 있는 의상도 남달랐다.

그는 정갈한 옷차림에 정확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십 년의 내공과 인간을 향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난 고객들 덕분에 이 터에 자리를 잡고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고객으로부터 자신의 가치가 그만큼 올라갈 수 있었고, 부를 이루었으며, 그래서 지금의 부는 올곳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죽기 전 자신의 전 재산은 '장례비'만 남기고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아름다움은 나눌 때 완성된다’는 그의 신념의 표현이었다.

결국 ‘아름다움’이란, '외모'가 아니라 '태도'이고, 태도란 '철학'이며, 철학은 '삶'이었다.


이상일 화가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의 삶은 그 자신이 말하는 예술 작품’이었다.

경기도 광주, 1만 평 대지에 22채의 건물을 지은 것은 '화려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예술, 명상이 어우러지는 ‘삶의 작업실’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설치 미술실에는 온통 꽃으로 표현된 그의 마지막 죽음으로 가는 장면, 영결식장을 표현한 '라스트 뷰티'였다.

그는 '죽음조차도 아름답게 정리할 수 있다'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 진짜 아름다움은 '함께 나누는 미'였다.

자신이 소유한 것들은 고객이 도와준 '물질'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여기에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들을 모아 전시하고, '옛날에 유명했던 미용사가 이천 산자락에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아주 어울리는 건축물을 지어놓고 죽었다'라는 '사회적 롤 모델'필요하다는 것이다.

끝으로 당신의 인생 마감은 여기에다가 올인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엄마의 뱃속을 통과하듯 어두운 통로를 지나 확실하게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고 있었다.

태어날 태 처음 우는 몇 초의 우는 표정으로 ' First Beauty '로 끝맺음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창밖으로 흐르던 풍경은 낯익은 듯 낯선 초록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들었던 작가 자신의 독백과도 같은 해설이 계속 머릿속에 숙제처럼 남았다.

오늘 하루동안 우리는 자신을 위한 시간을 살았다.

그리고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워크숍을 통해서, '예술'이라는 낯선 듯 익숙한 언어가 삶이라는 문장을 부드럽게 바꾸어 놓은 하루였다.

서울형 모아어린이집 '암사모두가치공동체' 교직원들은 오늘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수고한 당신들!

연 이틀 동안 강행군으로 체력은 바닥이 났지만,

우리 모두 다음 주에도 '파이팅' 넘치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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