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호 민의 재생 금지 목록
사람들은 누구나 재생 목록이 있다. 플레이 리스트. 자주 듣는 곡 말이다. 그런데 민은 특이하게 듣지 않는 곡 목록이 있다.
(배경 음악: 박효신 - 눈의 꽃: http://youtu.be/sr3JaQ3h7YA)
어느 날 민이 토끼눈을 하고 왔다. 민이 가을에 자주 입는 체크 남방의 빨간 줄들이 겹치지 않았을 때의 채도 정도로 말이다.
마지막 가을날일 것처럼 포근한 한낮, 원형 운동장의 계단에 멀찍이 앉아 있는 몇몇 가운데 민은 유난히 추워 보였다.
"민아, 너 눈이.... (무슨 일 있었어?)"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데 민이 말했다.
"노래를 들었어....."
"어? 노래? 무슨 노래?"
"그게.... 휴. 가을에 들으면 안 되는 노랜데 들어버렸어. 그것도 밤에 혼자서. 그래서 좀 울었어. 노래 때문에 울었다니까 웃기지?"
"아, 아냐. 나도 들으면 슬퍼지는 노래 있어. 그런데 많이 울었나 봐. 눈이 많이 부었어...."
"어, 좀. 이상하지. 참 좋아하는 노래였는데 언제부턴가 들으면 그냥 눈물이 막 쏟아져. 달라진 게 없는데...그냥...그냥...."
민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더 묻고 싶지 않았다. 민이 또 눈물이 쏟아져도 어색하지 않은 표정을 했기 때문에.
"참, 이따 점심 때 어디 가서 먹을까?"
"......."
"...너는 더 묻지 않네. 고마워. 그런데 그러니까 더 편해서 말하고 싶어진다. 어제 들은 노래는...이상하게 들으면 예전 생각이 나. 그때의 거리, 느낌, 날씨. 알지, 예전에 듣던 노래 들으면 그때의 기분이 드는 거.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 헤어졌을 때 생각이 나. 너랑 다르게 난 궁금한 거 못 참아. 그런데, 묻고 싶은데 더 물을 수 없었던 적이 있었어."
나는 말없이 민의 말을 들었다. 민처럼 멀리 농구 골대를 보며.
"못 물어봤어. 들어 주지 않아서. 어떤 대답을 들을지 무서워서. 왜 나를 사랑했냐고. 왜...나를 싫어하게 됐냐고.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안 듣는 게 나을 거라는 거 이제는 너무 잘 알아. 알지, 알아. 그런데도 가끔, 그냥 왠지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어. 그리고 이게 나 혼자만의 몫이라는 게 괜히 서러울 때가 있어."
나는 말없이 민의 신발 끈에 매달린 개미를 바라봤다.
"쭌 너도 혹시 그럴 때가 있어? ...알고 있니? 그래서 나한테 더 안 묻는 거야?"
.... 민이 연애를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혼자 도서관 간 날이면 잠깐 자리를 비워도 어김없이 민의 자리에 쪽지가 놓여 있다고 들었다. 민에게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뒤늦게 도서관에 합류한 내가 우연히 본 것만 5번은 된다.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은 길이나 버스 정류장에서도 민의 연락처를 묻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어쩐지 질투가 났었다. 귀엽던 민의 토끼눈이 잠깐이지만 미워 보였다. 나 역시 연애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감정은 달라졌지만 민처럼 생각날 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새삼 운 적은 없었다.
민은 왜 내게 그 얘기를 했을까.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민에게서 직접.
민은 정말 나를 그저 친구로만 생각하는 걸까. 나도 같은 감정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민은...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는 건가.
아니길 바란다. 나에게는 감정이 없다 하더라도, 예전 사람에게 감정이 향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잘 웃는 민을 저렇게 울리는 사람은 아니어야 한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민이 차라리 나 때문에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곁에서 달래줄 수 있으니까. 언제까지고 말이다.
그때 나는 왜 민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을까. 모르겠다. 민을 다시 만난다면 묻고 싶다. 대답을 듣고 싶다.
지금은 무엇보다 옆집이 혹시 네게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묻고 싶다.
나와 비밀번호가 같은 옆집. 민의 전화번호를 매일 되새길 옆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