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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 Jan 06. 2016

한평짜리 소설

19호-민은 □다

민은 나를 '준', '준아', '준이'라고 부르거나 가리켜 말한 적이 없다. 항상 '쭌'이라고 했다.

민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시기-그러니까 대학교 3학년 2학기 때-에는 거리에서 누군가가 '쭌'이 아닌 다른 말로 불렀는데 못 듣고 지나쳐 버린 적도 있었다.

민은 나라는 존재(?)를 '쭌'이라는 말로써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어감을 표현한 걸까.

어쩐지 특이한 민은 단어를 사전과는 조금 다르게 정의(?)한 말들을 좋아했다.

"예전에 광고에서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이'라고 했잖아. 최근에 어디선가 타인은 '아직 만나지 못한 가족'이라고 표현한 걸 봤어. 정말 짧지만 깊은 생각이 담긴 말이야. 이걸 주관적 정의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분명 객관적 정의일 거야."

민은 텔레비전을 잘 안 본다. 그런데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는 휴대폰 대신 텔레비전을 본다고 했다.

무슨 활동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시외버스를 타고 민을 포함해서 몇몇이 한참을 달려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 버스 안 텔레비전에서 장애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때 민이 우는 것을 처음 봤다. 뇌성마비인 장애인이 아버지로서 또 남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짠했던 걸까.

차에서 내려 활동을 마친 후 다시 침착해진 비장애인 민은 눈물의 이유를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서 울었던 게 아니야. 난 장애인이 아니니까.

아무리 공감하고 싶어도 슬픔의 내용을 알 수 없어. 관찰자의 입장으로서밖에는....

그런데 저 아버지의 어린 딸이 있잖아. 딸의 입장에서 부모님을 떠올릴 때의 마음을 생각하고 눈물이 났던 거야. 왜, 어렸던 우리가 나이가 들어 우리를 키워준 분들에게 한 행동을 곱씹을 때 눈물이 솟는 때가 있잖아. 아까 장애인 아버지를 둔 비장애인 딸에게 그런 때가 있을 때의 마음을 생각해 봐. 후회가 되는 행동들이 문득 생각날 때, 또 아버지의 큰 사랑을 느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 그걸 자식의 입장에서 조금 짐작해 보는 거야.

사람의 삶은 조금씩 다를 뿐이지 그 원형이 상징(?)하는 것은 같아. 어쩌면 하나일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그분, '춤을 추듯 걷는' 그 사람은 행복할 거야. 딸의 존재만으로도 말이야.

딸도 나중에는 슬픈 표정으로 아버질 떠올리지 않겠지. 그녀도 자식을 낳을 테니까. 아버지의 사랑, 그 마음을 끝없이 밝혀주는 건 자식이라는 걸 알 수 있겠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 존재를 기다려온 사람' 그게 가족이잖아. 나와 닮은 혹은 닮지 않은 그 존재만으로도 기쁨을 주는 사람, 부재만으로도 슬픔을 주는 사람..."

민에게 티브이 속의 그는 더 이상 타인이나 장애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춤을 추듯 걷고, 말하고, 밥을 먹는 사람이었다.

민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 걸까. 타인인 걸까. 그래도 민에게라면 타인도 나쁘지는 않다. 나는 다만 아직 만나지 못한 가족인 거니까. 하지만 역시 가족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겠지.

내게 민의 존재가 그렇듯, 민에게 나도 존재만으로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배경음악: http://youtu.be/D6eOFGCTw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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