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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 Aug 17. 2016

두평짜리 소설

12호-시간이 걸리는 것들

배경음악: 버스커버스커의 "여수밤바다"


여백의 의미를 알게 되는 점 같은 순간이 있다. 조급한 내가 느긋한 신을 만나서 그의 방식에 이유가 있음을 드디어(!) 이해하게 되는 순간.

어떤 일이 이뤄지기 전까지의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다양한 측면에서 일어나는 기다림이 사실은 과정 중의 하나로 필요한 것이라고 깨닫게 된 이후에는 쉽다, 인내하는 것이. 삶의 침묵을 견디는 힘이 생긴 것이다.

언젠가 쭌이 그런 지혜가 있는 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좀 긴 이야기였지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니, 요즘 들어 부쩍 생각이 나는 것 같다. 우리가 그 전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잊어버렸다. 쭌의 말을 되짚어 적어봤다.


"...근데 그 형은 서울이 집이 아니야. 처음 직장 때문에 상경해서 구한 집에 들어갈 때는 보증금 300만 원도 대출을 받았대. 그리고 이사하려고 구한 집에 들어가면서는 사기를 당했어. 이사하고 일주일 뒤에 나오면서 돈 500만 원을 떼였대. 그때 그 형 유동 자산(?)이 600만 원 정도였거든. 그래서 동료 집에 얹혀 살면서 다시 돈을 모았대. 동료의 여친이나 가족이 오는 날에는 사우나실에 가기도 하고, 밤새 놀다가 도서관 같은 데 들어가서 낮 내내 자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 형이 다시 돈을 좀 모았어. 와, 근데 그 형은 진짜(!) 독한 것 같아. 술 안주가 남으면 그게 국물이 질질 새든 지하철 안에서 냄새가 나든 말든 꼭 싸 달라고 하더라고. 만약 우리 친형이 이렇게 돈을 한 푼 두 푼 모으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어. 형하고 같이 떡볶이를 사서 집에 돌아갔는데, 그 형은 같이 먹고 남은 떡볶이 국물에 밥도 비벼 먹고, 삶은 계란도 넣어서 부셔 먹고-알지, 그 왜 가루 내서 국물이랑 비벼서 먹으면 맛있잖아. 세 끼를 그걸로 해결하는데 진짜 짠함을 넘어서는 느낌이 들었어. 그리고 성공한 뒤에 이 형이 날 어찌 대할지는 그때 계란 노른자 한 개를 나 더 먹으라고 양보할 때 느꼈지. 이 형이 자기 혼자만을 위해 이렇게 지독하게 돈을 아낄 사람은 아니라는 거. 너도 느낌 오지?"

"...그래, 좀 심하게 알뜰하시기는 한데 나쁘지는 않은 분이신 것 같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지내신대?"

"그 형이 드디어 동료 집에 얹혀 사는 걸 끝내고 전세집으로 이사를 간 거야. 진짜 그 소식 듣고 내가 다 기쁘더라. 짐 정리도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형이 한사코 말리시더라고. 암튼 짐 정리 다 돼고 형 집에 집들이를 갔지."

"집 어땠어? 형이 음식 뭐 만들어 주셨어? 맛있었어?"

"음식 먹기 전에 사람들이 참 다양하게 많아서 깜짝 놀랐어.

형이랑 동고동락하던-사실 형이 살짝 민폐를 끼쳤던 동료분도 오셨고, 형이 이직하기 전 회사의 상사분과 동료도 한 분 오셨고, 시기는 조금 달랐지만 어쨌든 함께 상경한 고향 친구분도 왔고, 형이 예전에 살았던 집의 부동산 아저씨도 오셨더라고. 또 종종 같이 농구 게임했던 예전 동네의 이웃분도.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다들 나처럼 형의 전세 입성을 너무나 축하해 주려고 어색함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된 거야.

신기하지 않아? 우리는 생각보다 어색함이 없었어. 왜냐면 사실 형이 나한테 거기 모인 분들에 대해서 한번씩 이야기를 하셨었거든. 그래서 궁금하던 분들과 인사 나누고 이야기도 주고받다 보니까 그냥 원래 내가 알던 사람을 만난 것 같더라. ㅎㅎ"

"ㅎㅎ맞아. 나도 친구한테 친구의 친구 이야기 듣다가 그 친구 만나면 괜히 친근해. 같이 얘기하다 보면 나랑 그 친구가 더 친해진 것 같아서 소개해 준 친구한테 질투도 받고.ㅋㅋ"

"암튼 그렇게 재밌게 시간을 보냈지. 형이 그 많은 음식들을 다 직접 해서 대접하더라. 잡채에 불고기에 자장면에 세비체에 뻔냄(?)하고, 크로크무슈인지 뭔지까지. 그날은 술 안 했어. 저녁 먹고 디저트(?) 먹고 담백하게 끝. 그러고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형이랑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하게 됐어."

"와, 포장마차! 다음에는 나도 불러줘~ 나도 포차에서 한잔 기울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거 해 보고 싶어."

"알았어, 다음에 꼭 너도 같이 가자. 암튼 그 형이 그때는 울었었어. 너 군필자가 우는데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 아니?  상대방의 우정에 대한 신뢰 없이는 울기 힘들어. 그냥 찌질한 놈으로 소문 나기 좋거든."

"맞아. 남자도 감정에 솔직해져도 비난받지 않거나 놀랍다는 반응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어. 사실 나는 지하철에서 너무 당연하게 여자분들에게 자리 양보하는 남자들 보면서 그런 생각했어. 얼마나 앉고 싶을까. 안됐다. 만약 내 남동생이 저렇게 옆의 분에게 자리 양보하면 좋기는 하겠지만 난 꾸역꾸역 내 동생을 자리에 앉힐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봤지..."

"정말? 놀라운데~ 암튼 고맙다. 사실 진짜 피곤할 때도 있기는 해. 가령 방학 때 택배 알바 끝내고 집에 갈 때? 솔직히 밤새 놀고 난 다음에 집에 갈 때는 별로 양심상 그런 생각 안 들지만.ㅎ"

"암튼 난 자리 양보해 주시는 분들이나, 저기 자리 비었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시는 분들 항상 너무 감사하더라. 완전 엄지 척!^^"

"ㅎㅎ나도 그래. 암튼, 형이 그날 나한테 집들이 때는 못 했던 속 얘기를 하고 나서 우시더라. 난 그때 또 내 친형이 울면 기분이 이럴까 생각이 들더라. 진짜 나도 눈물이 났어. 형이 그러는 거야..."

아래는 쭌이 말한 형의 이야기를 최대한 그대로 옮겨 봤다.

"사실 집 새로 구한 게 참 좋은데, 대출도 많이 꼈고 직장하고 거리도 꽤 멀어.

그런데 말이다. 나 서울에서 갓 상경했을 때 가족들이 나 보러 서울에 온다고 할 때 덜컥 겁이 나더라. 너무 집이 좁았거든. 별로 많지도 않은 우리 가족 다 같이 나란히 누울 공간도 없었어. 그래서 바쁘다고 핑계 댔어. 물론 가족들이 와서 나 사는 모습 보더라도 이해는 하겠지만...하. 돌아가면서, 돌아가는 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냐. 우리 어머니 분명 우실 거다. 미안해하시면서 말이다. 하.

그런데 준아. 준아? 야, 니가 왜 우냐. 하 짜식. 우는 것도 따라 하고. 술이나 따라 봐라. 자 이제 원샷 따라 하기. 울지 마, 임마. 넌 형보다 더 시간이 덜 걸릴 거야. 너는 서울에 집이 있잖아, 가족도 있고.... 암튼 형 이제 옮긴 집 봤지? 넓은 거. 고향 집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넓은 편이잖아. 서울에서. 아닌가? ㅎㅎㅎㅎ.

준아, 준아. 술이 참 달다. 안 그냐? 하. 사투리 감추느라 고생하지만 난 전화하면서까지는 서울말 못 쓰겠더라. 내 엄마가 쓰는 말이 사투리인데. 아 지역어라고 하는 게 낫나? 아니 사투리가 뭐 어떻노. 지역어라고 하든 사투리라고 하든 우리 할배, 할매 다 잘 썼고 부모님이 쓰는 말인데. 하.

암튼 준아, 어? 뭐? 너 지금 뭐라캤노? 사투리 쓴 기가? ㅋㅎㅎㅎㅎ진짜 쑥쑥하네~ 야~ 내가 서울말 쓰면 이런 느낌인 거가!ㅎㅎㅎㅎ재밌네~ 함 더 해 봐라. ㅎㅎㅎㅎ쫌 한다? 역시 니 내 친(한^^) 동생 맞네이~

암튼 준아... 혼자 짐 정리한다고 했던 거 미안하다. 형도 니가 도와주고 하면 나도 나중에 도와줄 때 되면 도와주고 참 좋은데 형이 차가 없잖아. 니가 오면 이삿짐 센터 용달차에 앉힐 자리가 마땅찮다. 둘 다 짐칸에 타고 갈 수도 없는 게 요즘 용달차고. 형이 덩치 큰 게 그날 처음으로 불편하더라. 와 나 두 사람 가운데 껴서 이동하는데 진짜 내 몸도 짐처럼 느껴지더라고. 그래, 전에 이사할 때 그랬기 때문에 너 못 불렀다. 안 친해서 안 부른 거 아니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 한잔하자!

준아~ 준아. 달 봐라. 달이 저래 예쁘다. 형 야근한 날은 꼭 저렇게 달이 예쁘더라. 일하느라 해는 구경도 못 하고 사는데 대신 달이 저렇게 나 위로해 주나 싶더라고. 꼭 평소에는 달이고 뭐고 안 보고 지하철 끊기기 전에 시간 맞추려고 부랴부랴 가는데, 희한하게 밤하늘 보는 날이 있어. 그날은 특히 일이 힘들어서 뭔가 보상을 받고 싶은가 봐. 여튼 그런 날 꼭 보름달이 떠 있더라. 어? 너도 그래? 아이~ 뭐고. 내만 그런 줄 알았는데. 하긴 달이 니거 내거 어디 있겠나. 우리 거도 아니다. 그냥 달은 달이지.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아~ 아니야~ 형 취한 거 아니야~ 형 이제 중요한 얘기하려고 한잔 더 하는 거야.

준아, 준아. 준아! 그렇게 짐 정리하고 누운 날 천장을 보는데 형이 무슨 생각했는지 아냐? 고향 집 생각했다. 고향 집이 꽤 넓거든. 우리 고모들이 엄~청 많은데 오면 다 같이 잘 수 있다. 고모부들이 와도 수용 가능. 멋지지? 하하. 그런데 말이다. 그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우리 집이 큰 이유가-아~ 형 진짜 어릴 때 힘들었거든. 청소하는 거 진짜 빡세다. 전화 바꿔 줄 때도 겁나 뛰어가야 돼. 그래도 전화 바꾸는데 왜 이렇게 시간 걸리냐고 해서 나중에는 창문 열고 소리 질러~~~! 바꿔줬지.

아, 형이 무슨 얘기하려다가.... 아, 그래. 준아, 내 동생 꼭 닮은 준아. 야 너 진짜 내 동생 닮았다. 내 동생 해라.ㅎㅎㅎ형 동생 장가 갔거든. 그 새끼 장가 가더니 바보 됐다. 딸 바보.ㅎㅎㅎ근데 나도 바보 됐다. 조카 바보. 요즘 애들만 그런 건지 우리 조카만 그런 건지. 진짜 똑똑해. 아니 자랑하는 건 아니고~ 전교에서 1 등 하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아. 초등학교 시험지 봤냐? 야, 우리 고등학생 때 문제보다 더 어려워. 아, 너는 나보다 좀 어리지? 그럼 너 중3 때.ㅎㅎㅎ

준아~ 형이 조카 자랑하려는 건 아니고. 무슨 얘기냐면, 그래서 첫날 누웠는데 천장이 우리 고향집 같은 거야. 닮은 거야. 물론 좀 더 작지만. 그때 알겠더라고. 우리 고향집이 왜 그렇게 컸는지. 멀리서 오는 손님들, 물론 다 가족 아니 지금도 가족이니까 식구였던 사람들이 편하게 묵고, 돌아가는 길에서도 마음 편하게 가라고 집이 그렇게 컸던 거야. 하. 그걸 몰랐다. 우리 조카는 벌써 알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야, 조카도 모를 거다. 그건, 가족만 가르쳐 줄 수 있지. 아니지. 시간만 가르쳐 줄 수 있지.

암튼 그때도 눈물이 흐르더라. 형이 찌질한 사람은 아닌데. 눈물이 딱 한 줄기가 무슨 드라마 주인공처럼 딱 흐르더라. 아니, 콧물은 안 났고. 어, 드라마 주인공처럼. 왜 까리하게 딱 흐르는 거 있잖아. 콧물 안 났다고. 와 나. 형 중요한 얘기할 거야. 웃지 말라고.ㅎㅎㅎ이 새끼. 형 이제 안 울어. 걱정 마. 사실은 그때 많이 울어뒀거든. 아니 그때도 콧물은 안 났다고. 와 임마, 이거.ㅋㅋㅋ

준아, 그때 눈물이 흐르는데~ 왜 그렇게 조상님들 생각이 나는지. 왜 우리 할배, 할매, 외할매, 외할배...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아직도 우리 지켜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운 것도 말했는데, 형 그때 영상 편지 찍었다. To! 조상님들요. 고맙니도. 어? 무슨 뜻이냐고? ㅎㅎㅎ야~ 니 알면서 묻는 거 뭐 백치미 연습하나? 안 어울린다, 마. 니는 백치미 하지 마라, 마.ㅋㅋㅋ

영상편지 길게 찍다가 마지막에 그 말 할 때는 목이 탁 막히더라. 그 말... '이제야 우리 가족들 서울에 나 보러 오면 다 같이 누워 잘 방을 구했네요. 참 좋네요. 다른 것도 좋지만 그게 제일 좋네요. 고맙니도, 고맙니도.... 5년이 걸렸지만, 그래도 참 좋네요. 고맙니도.'...."

"형이 그런 얘기하는데 나도 눈물이 나서 일부러 웃긴 얘기하고 했지. 우리 그때 포차에서 인생극장 찍었지 않냐?"

"ㅠ.,ㅜ"

"너 콧물 흘리는 거야?ㅎㅎㅎ닦아, 닦아. 자~ 흥 해!"

"아, 콧물 안 난다고. 진짜.ㅎ"

"...형 그렇게 영상편지 찍은 날에 잠을 못 잤다더라.... 울다가 웃다가. 조상님들한테 편지 쓰다가.... 그러고 다음 날 출근했대. 눈 퉁퉁 부어 갖고."

"쭌은 어떨 것 같아?"

"뭐가?"

"너무 시간이 걸려서 찾았는데, 이뤘는데 과정이 너무 길었던 것 같을 때."

"글쎄."

"나는 기쁜데 한편으로는 눈물이 날 것 같아. 눈물은 언제나 아픔이 있어. 그게 과거형이든 미래형이든. 아마 기쁠 때 나는 눈물이 담은 아픔은 과거형이겠지? 그래도, 그래도 아플 거야...."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우리들은 왜 이렇게 시간이 걸려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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