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호-치자, 그녀의 향기
요즘 들어 책상 위에 놓인 치자가 시들해 보였다. 어쩐지 먼지 쌓인 듯한 잎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괜찮냐고 말을 걸거나 잎을 닦아주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치자와의 이별을 준비할 때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떨어진 파란 잎을 가장 아끼는 두꺼운 공책에 끼워 넣고 첫사랑에게 주지 못한 편지처럼 간직하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꽃봉오리인지 새 잎 무더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달려 있었다. 치자는 들여오던 그때 이후로 쭉 꽃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확신이 없었다.
내가 아는 식물은 치자뿐이다. 그러니까 식물만 놓고 따지자면 내 첫사랑은 치자인 것이다. 이것이 이별인지 더 깊어져 가는 감정인지 알 수 없을 때 치자는 친절하게도 꽃봉오리에서 꽃잎 하나를 틔워냈다. 썸만 타다가 어느날 고백을 받았을 때의 기쁨이 이럴까.
무려 4년 만에 치자는 자신이 꽃임을 새삼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마치 나를 위해 치자가 꽃을 피운 것처럼 고마웠다. 꽃을 피우는 것은 사람으로 따지면 출산처럼 쉽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치자가 4개나 되는 꽃봉오리를 품었고 그 중 하나-그러니까 첫째의 얼굴을 빼꼼 보여 준 것이다.
나는 마치 아내의 순산을 기원하는 남편처럼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하늘은 고맙게도 내게 꽃잎을 하나씩 틔워 내고 비로소 꽃이 활짝 피는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했다.
치자가 부쩍 지쳐 보이는 것이 꽃을 틔워내기 위한 것이지 나와 이별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적이 안심이 되었고, 미뤄둔 작업을 완료하기 위해 책상에 앉은 날이었다. 밤늦은 시간 꽃잎 하나를 문처럼 열어둔 꽃봉오리 덕분에 꽃향기를 맡으며 노트북과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빼꼼 고개를 내민 꽃봉오리가 어쩐지 아까보다 벌어진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들여다보니 꽃잎 하나가 더 틔워져 있는 게 아닌가. 오, 이런 기적이.
또 한 시간쯤 작업을 진행하고 나니 다른 꽃잎도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있었다'라고 쓸 수 있는 게 진심으로 행복하다. 그러니까 일기를 쓰는 지금 나는 치자의 순산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 본 뒤라서 그 소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오후 4시부터 새벽 3시까지 계속된 작업 중간중간 책상에 놓인 치자가 꽃잎을 틔워 내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더디게 진행되었다면 더디고 4년 동안 무소식이었던 걸 생각하면 서운하리만치 빠르게 흘러간 시간이었다.
부디 둘째의 순산 과정도 지켜볼 수 있기를. 가장 힘들지만 가장 향기로운 치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갈채를 보낼 수 있기를.
요즘 나는 첫째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치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치자야, 너는 꽃이 피어도 피지 않아도 내게는 늘 꽃이야. 아니, 가족이야. 꽃이 져도 나는 네 꽃향기를 기억하고 있어. 잊지 않을게. 너를 가장 향기로운 꽃으로 기억할게."
문득 그려 본다, 이 향기를 손수건만큼만 싸서 보내고 싶은 누군가의 눈을 감은 모습을. 아마 지금쯤 자고 있겠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싶은 밤이다. 빠르다면 빠르고 더디다면 더디게 눈을 뜨는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고 싶은, 그런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