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 Arrival>
영화 <컨택트 Arrival>에서 햅타포드라는 외계종족이 인간을 만나러 온 건 3천 년 후 그들에게 위기가 찾아왔을 때 인간의 도움이 필요해서였다. 그 도움을 받기 위해선 지금 인간들에게 햅타포드어를 알려줘야 했다. 어쩐지 나는 그들이 루이스를 돕기 위해 찾아온 것만 같다. 당신이 겪게 될 슬픔을 미리 알려주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선물이 될 수 있을까?
햅타포드가 떠나고 임무를 마친 이안과 루이스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다. 루이스는 이안과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모두 알고 있다. 그와 결혼해서 딸을 낳고, 이안은 그녀를 떠나고, 소중한 딸은 일찍 세상을 떠난다. 루이스는 말없이 이안을 껴안았다. 이것이 루이스의 대답이다.
로맨스 영화도 아닌데 루이스가 이안을 껴안는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나는 루이스 얼굴에서 확신도 망설임도 읽지 못했다. 그저 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을 안아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가올 미래를 끌어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화를 본 후 사람들은 묻는다. 당신이 만약 루이스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묻는다. 마치 이안을 거부하고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루이스는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미래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루이스에겐 그런 선택권이 없다. 그러니 나는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이 겪게 될 슬픔을 미리 알려주는 게 선물이 될 수 있을까?
“기억은 참 이상하지.
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
우린 너무 시간에 매여 있어. 그 순서에.
난 순간들의 한가운데서 널 기억해.”
루이스라면 Yes라고 답했을 것 같다. 그녀에게 작별은 더 이상 ‘마지막’을 의미하는 게 아니니까.
내 아이(초등학교 4학년)는 종합심리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예약하던 날 의사는 자폐검사(CARS)를 추가하자고 했다.
왜요? 아이가 불안도가 높고 감정조절의 어려움이 있어서 찾아온 것뿐이에요. 자폐 검사를 왜 하나요? 의사는 ‘의심’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듣는 날. 나는 지능지수가 낮게 나올 것을 염려했다. 언어발달이 매우 느렸던 탓에 6세 때 받은 지능검사에서 80점이 나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많이 좋아진 탓인지 아이의 지능은 103이 나왔다. 평균지능에 속했다. 그리고...
의사는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는 게 자신의 진단이라고 말했다.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의사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자신의 진단’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 같았다. 보고서에 나와 있듯이 검사 수치가 경미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아스퍼거’가 의심된다고 했다. 대학병원에 가서 더 정밀한 검사를 받아보길 권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그러니까 그 의자는 움직이지 않는 의자였는데 내 심장이 널을 뛰고 있었다. 현기증이 났다.
아스퍼거. 지능이나 언어발달에 큰 문제가 없는 경미한 자폐. ‘경미한’에 눈을 두면 되는데 자꾸 시선이 ‘자폐’ 쪽으로 미끄러졌다. 아이가 36개월이 되도록 엄마 소리도 못하고 눈 맞춤도 안 되길래 자폐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28개월부터 발달센터에서 언어치료를 받았고, 놀이치료, 감통치료도 받았다. 영원히 말을 못 할 것 같던 아이는 5세가 되고 나서야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단어가 늘었고 이름을 부르면 내 눈을 보았다! 6세가 됐을 때는 또래와도 말을 주고받았고 얼렁뚱땅 한글도 일찍 뗐다. 책도 혼자 잘 읽었다. 7세 때 받은 언어평가에서 처음으로 ‘정상발달 수준’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도움반에 갈 필요가 없었고 초등학교에서 교과 공부도 무리 없이 잘 따라갔다. 아이가 좀 유난스럽다고 생각은 했지만 ‘자폐’를 떠올리진 않았다. 그 단어는 잊힌 지 오래였다. 분명 그랬는데…
햅타포드어를 모르지만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아이에게 닥칠 일들이 보이고 그 옆에서 괴로워하는 나도 보인다. 지금의 문제는 지금대로, 앞으로 다가올 문제는 그 문제대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 게 분명하다. 도망갈까? 나는 한때 도망치기 선수였는데. 도망을 칠 수가 없다. 앞에 커다란 벽이 있는데, 아니 문 하나가 있는데 그 문을 열면 내가 아는 미래로 연결된다.
나는 문지기에게 말한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저리로 나가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고 있다고요.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후우,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다.
문을 연다.
걸어 나간다.
이게, 내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