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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미 Apr 20. 2020

1940년대 미국 영화 평론가들에 대한 단행본

데이비드 보드웰 『미국 영화비평의 혁명가들』

Q.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영화를 사랑했는지

=열두셋의 나이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A.I.>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보다 어린 나이에는 제임스 카메론을 보고 아버지에게 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미국영화를 통해서였다.


몸담고 있는 영화잡지에서 오늘날 시네필 문화를 다루는 특집 기사를 썼습니다. 시네필들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저 또한 답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질문을 받아들고 곧 바로 써내려갈 수 있었는데, 위의 내용은 제 답변 중 하나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써내려가면서 새삼 제게 영화란 미국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성장한 후에야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 등의 한국 영화에 빠질 수 있었으니까요.(한국 영화는 늘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추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어서 좀 더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곤 대학에 들어가서 유럽 영화를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전에도 보긴 봤는데 어설프게 유럽 영화를 봤던 것 같아요. 아무튼 제가 영화를 사랑하는 일이 미국 영화와 뗄 수 없었다는 걸 깨달았던 한주였습니다. 기사를 마감하고 떠나보내며 그를 반추할 즈음에 즐겁게 읽은 책이 있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데이비드 보드웰의 단행본 『미국 영화비평의 혁명가들』입니다. 원제는 『The Rapsodes』로 그리스 가수이자 음유시인을 뜻합니다. 책은 1940년대 미국에서 영화평론가란 직 자리를 잡아갈 무렵 활발히 활동했던 네 명의 평론가, 오티스 퍼거슨, 제임스 에이지, 매니 파버, 파커 타일러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화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글을 썼다. 그들은 1930년대 중반에서 1950년대 초반에 이르는 할리우드 황금기를 추적했는데, 당시 할리우드 시스템은 한마디로 영화the movies 그 자체였다. 퍼거슨이 작업을 시작하던 무렵, 스튜디오는 토키를 갓 터득한 참이었고, 그는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전통이 실제와 똑같은 대화, 일상과 대공황 시대의 관계를 흡수하는 과정에 매혹되었다. 에이지와 파버는 전쟁의 새로운 리얼리즘과 도시 멜로드라마를 평가하면서 스튜디오 전쟁 영화의 연대기를 작성했다.  에이지가 후방 드라마the home front drama 및 코미디에 동조하는 동안, 파버는 후에 프랑스에서 필름 누아르로 명명된 잔인한 액션 영화에 몰두했다. 같은 시기 할리우드에서는 진지하게 혹은 가볍게 꿈, 정신분석, 신화 등을 이야기에 결합시키기 시작했고 타일러는 이 변화에 집중했다.(p. 15)


퍼거슨은 매끈한 이야기와 편집을 사랑했던 영화 평론가였습니다. 재즈 비평가였던 덕분에 언터테인먼트 업계와 가까웠고 영화 촬영 현장을 찾아가 가까이에서 보는 기회를 누렸던 평론가이기도 합니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영화평론가와 영화기자들은 쉽지 않은 취재방식입니다. 선배 세대가 쓴,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촬영을 하루 종일 지켜보고 배우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는 글을 보긴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습니다. 퍼거슨은 그 유명한 윌리엄 와일러와 프리츠 랑의 현장에 찾았다고 합니다. 그는 “리우드 고유의 미학에 대한 근거로 내러티브의 명료성, 감성적 공감, 익숙한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을 꼽았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극영화의 기본 미덕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올해의 영화"로 호명할 때, 다른 목적보다 자의식이나 돌발성에 무게가 실린 현대의 평론가들보다는 솔직하고 책임감 있어 보이는 태도인 것 같니다.(하스미 시케히코가 『까이에 뒤 시네마』가 2017년 최고의 영화 <트윈 픽스: 더 리턴>을 꼽은 것을 두고 이와 비슷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두번째 평론가인 제임스 에이지퍼거슨의 평론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문체가 돋보였는데, 저자 보드웰은 “과도한 희망overstrained hope”, “아직 형상을 드러내기 이전의 에로틱한 감각성pre-specific erotic sentience” 등 에이지의 표현들을 소개합니다. 에이지는 “컬트적인 명성”을 얻었고 “젊은이들은 그에게 열광했”으며, 그 스스로도 보헤미안이었고 작가였습니다. 영화 <아프리카의 여왕>과 <사냥꾼의 밤>에 각본에 참여한 각본가이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 평론가는 “흰 개미 예술termite art”로 유명한 매니 파버입니다. 저자 보드웰은 파버가 넷 중 가장 시네필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고 설명하는데요. 저 또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네 사람 중 유일하게 주창하는 담론을 들어본 평론가입니다. 파버는 화가로서 교육받았고, 영화를 평할 때는 미술 평론가로서 주장할 때와는 다른 이야기를 펼쳤다고 합니다. 그는 평면성을 회화의 새로운 가치로 꼽았던 모더니즘 미술계에서 폐기한 환영성을 영화에서 주요한 가치로 찾았습니다. 섬세하게 표현된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긍정적으로 평했고 그가 보기에 영화의 핵심은 결국 액션으로 말해지는 이야기이며, 영화적 기법을 통해 유연하고 정서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습니다. 그의 문체 또한 흥미로운데, 리뷰에서 ‘당신’이란 단어를 자주 썼다고 합니다. 이런 전략은 평론가가 받는 인상이 영화 관객이자 리뷰를 읽는 이에게 전이되면서 “평론가가 수십 편의 다른 영화에 대한 지식을 독자에게 당신의 것이라고 돌릴 때 우쭐해”지는 효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파버는 또한 흰개미-흰코끼리 예술 이론에서 알 수 있듯이, 계획되지 않고 무심하게 포착된 영화만의 새로운 디테일을 잘 짚어내길 좋아하는 평론가였습니다.


파커 타일러는 스토리텔링이 유연하든 말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비이성적인 확장irrational enlargement"이라는 초현실주의 전통을 기반으로 『할리우드의 환각』(1944) 및 『영화의 마술과 신화』(1947)를 통해 할리우드 내레이션의 반짝이는 표면에 존재하는 균열을 점검했다. 또한 성소수자로서, 서슴없이 자신이 본 모든 작품의 젠더 관련성에 대해 논했다.(p.21)

마지막 평론가 파커 타일러는 보드웰에 따르면, 가장 덜 알려졌지만 지금 가장 적극적으로 읽어내야 할 인물입니다. 타일러는 영화 만들기는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뿐더러 배우들의 연기는 '샤레이드 놀이'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우들은 플롯에 따라 연기를 하지만, 결국 완벽히 그 캐릭터가 되는 것에 실패한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배우 송강호는 <택시 운전사>에서 5.18 당시 광주에 독일 기자를 태우고 간 택시 기사를 연기하지만 결국엔 다시 그에 도전하는 송강호가 된다는 입니다. 타일러는 영화를 몸짓만으로 제시어를 알아맞히는 게임인 샤레이드에 비교하는데요. 관객은 배우의 흉내를 기반으로 그들 마음 속에 진행되는 일이 뭔지 간파해야 합니다. 샤레이드처럼 할리우드 감독들 관객들에게 길고 방대한, 분리된 의미와 느낌을 소환하게 만듭니다. 타일러가 보기에 할리우드 영화의 진실한 가짜-몸짓은 잠자면서 꾸는 꿈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몸짓은 이런 아름다운 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심각한 문제를 견딜만하게 만들어 우리를 위로한다. 그들은 우리의 악덕을 떠맡는 희생양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보고 웃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감정적 깊이가 있다.”(p. 228)




덧1. 매니 파버의 흰개미-흰코끼리 예술에 대한 설명은 책의 역자인 옥미나 선생님이 설명한 내용을 보시면 이해하시기 쉬울 것 같습니다.

흰 개미 예술termite art: 아무런 문화적 야심 없이 흰개미처럼 미시 영역에 몰두하여, 한 순간을 포착하는 데 집중하는 작품.

흰 코끼리 예술white elephant art: 걸작의 명성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웅장하고 야심만만한 예술. 특히 평론가들이 주목하는 미덕을 겨냥하여 작품 전체를 반짝거림으로 채우고, 뚜렷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덧2. 네 평론가의 이모저모를 읽고 있으면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파버의 "당신은"이란 독자 호명에선 정성일 평론가가 생각났고, 타일러의 샤레이드 비유에선 유운성 평론가의 「형상적 픽션을 향하여」라는 글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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