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하이선이 한반도에 북상 중이다. 고향에 들렀다가 KTX를 타고 태풍보다 빠른 속도로 서울로 다시 돌아가는 중이다. 전세계에서 유행 중인 바이러스가 걱정되기도 하고, 주말 늦은 밤 누군가와 굳이 가까이 앉고 싶지 않아 객실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 기차가 출발할 때쯤 대각선 앞자리에 검은 정장을 쫙 빼입은 남성 한명이 앉았다. ‘일요일밤 기차 마지막칸에 타는 사람이 왜 정장을 입고 있을까. 집에서 잠만 자고 월요일인 내일 출근할 때 그대로 출근하려고?’ 엉뚱한 유추를 하며 참 기묘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일행으로 보이는 남성 두 명과 여성 한 명이 나타나 남자 주위에 흩어져서 앉는다. 모두 검은 정장 차림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장례식장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가는구나’
글을 쓰고 있는 KTX 안에서 방금 벌어진 상황이다. 순간적으로 오싹한 기분까지 들었다. 마침 KTX 방송까지 지지직대며 찢어진 소리를 내고 있으니 무서운 기분은 배가 되었다. 비가 내려서인지 통신이 여의치 않아서인가 싶지만 잘은 모르겠다. 공포스러운 상황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방금 눈앞에 벌어진 일처럼, 어떤 기묘한 이미지가 무심하게 관찰되다가, 후에 비슷한 이미지들이 덧붙여지면서 의미나 규칙을 만드는 데에서 나타나는 불쾌함이 아닐까. 물론 오늘 고향집에서 머물며 어머니 밥을 먹으면서 긴장을 놓은 채 오성대 작가의 인기 웹툰 <기기괴괴>를 연달아 보다가 서울로 가고 있으니 여러모로 찜찜해진 탓도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웹툰 <기기괴괴>에서 탄생한 애니메이션 영화 <기기괴괴 성형수>를 리뷰하고 싶다.
영화 <기기괴괴 성형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데에는 어떤 액체가 필요하다. 바르면 성형이 되는 액체, ‘성형수’다. 성형을 원하는 사람은 성형수란 액체와 물을 1:4 비율로 섞는다. 이때 절대 성형수 원액이 피부에 닿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살이 녹아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호흡을 위해 호스를 입에 물고 20분 동안 성형수에 얼굴을 담근다. 20분 뒤 찰흙처럼 녹은 살은 칼로 떼어내고 원하는 모양대로 손으로 매만져 얼굴 성형을 한다.
연예인 메이크업 담당 일을 하고 있는 주인공 예지는 몸집이 크고 외모에 자신이 없는 20대 여성이다. 외모로 인해서 갖은 멸시와 조롱을 받는 그녀는 자신의 담당 연예인이 출연하는 다이어트 보조식품 홈쇼핑 방송 현장을 찾았다가 대비를 위해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보조출연자 제의를 받고 카메라 앞에 선다. 카메라 앞에서 뚱뚱한 여성에게 주여진 역할은 음식에 집착하는 여성일 뿐. 예지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어쩌지 못하고 게걸스럽게 치킨과 피자를 먹어치운다. 방송 이후 인터넷에서 일명 ‘짤’이 되어서 놀림감이 되어버린 자신의 이미지를 컴퓨터 모니터로 확인한 예지는 큰 충격에 빠진다. 그렇게 며칠이고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예지에게 어느 날 택배 하나가 도착한다. 성형수 두 통과 찰흙 같아진 살을 떼어낼 조각 칼, 사용법 동영상이 담긴 USB 등 성형수 꾸러미다. 영상 속 여성은 얼굴을 20분간 담그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 뒤, “20분이 너무 길다고요? 지금까지 당신이 외모로 고통받은 시간에 비하면 찰나입니다.”라고 속삭인다. 예지가 성형수의 마력을 거부할 수 있을까.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손재주가 좋은 예지는 성형수를 이용해 아름다운 얼굴을 빚어낸다. 하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퉁퉁한 몸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얼굴과 몸 모두 완벽한 조화를 이룬 미인이 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커져만간다. 운동으로 살을 뺄 수도 있겠지만 드라마틱한 변화를 원하는 예지는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성형수를 원한다. 예지는 성형수를 택배로 보낸 이를 찾아가 더 많은 성형수를 구매 의사를 표하고, 성형수를 공급하는 이는 2억을 요구한다. <기기괴괴 성형수>는 예지가 성형수를 이용해서 아름다워진 이후, 설혜란 이름으로 연예인 생활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기괴하고 끔찍한 욕망과 이미지들을 훌륭하게 그려낸다.
원작 <기기괴괴>는 세계관을 설정하고 세계관 안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를 짧게는 하나의 에피소드, 길게는 10주간에 걸쳐서 연재하는 웹툰이다. 그동안 연재된 이야기 중에는, 찍으면 귀신이 찍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나, 한권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틀리지 않고 소리내 읽으면 세상의 모든 지식을 깨우치게 된다는 이야기 등 흥미로운 세계관이 많다. 성형수 에피소드는 <기기괴괴> 시리즈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았던 에피소드로, 오성대 작가가 긴 휴식기를 가지고 시즌2로 돌아왔을 때 이미 완결한 성형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연재할 만큼 작가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에피소드다. 영화 <기기괴괴 성형수>는 2015년 연재된, 10분 내외로 감상할 수 있는 웹툰의 에피소드를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탄생시키면서 캐릭터들의 전사를 꼼꼼히 채워 전체 서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웹툰에서는 뚜렷하게 제시되지 않았던 예지의 직업이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설정되면서 뷰티산업에 긴밀하게 엮인 다층적인 캐릭터가 탄생했으며, 어린 시절 발레를 하다가 외모로 인한 불이익을 받은 이야기도 추가되었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연예인 설혜가 된 예지가 경험하는 사회 역시 녹록지 않다는 점을 꼬집으며 외모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도 승자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좋은 원작의 힘에다 좋은 장편 영화화가 이뤄진 <기기괴괴 성형수>는 오는 9월9일 개봉한다.
덧1. 공포장르를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싫어했는데, 20대 중반 이후 그럭저럭 즐기게 된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으니 볼 때는깜짝깜짝 놀라며 재밌게 보면서도 잠자리에서 딱히 떠오르지는 않더라구요. 그래서 나름대로 이 장르를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기기괴괴 성형수>는 오컬트, 호러, 슬래셔 등의 장르로 분류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원작 팬들은 물론 원작을 전혀 모른 채 감상한 저같은 분들도 충분히 좋아하실 수 있는 작품입니다.
덧2. 저는 <그것이 알고 싶다>의 팬이기도 한데요. 주말 저녁에 잠들기 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를 여러 편 연달아서 보고 자는 취미가 생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알게 된 건데 CCTV에 찍힌 이미지가 굉장히 공포스러운 소재더군요. 교통사고나 뺑소니, 살인 후 도망 등 피의자를 특정할 수 없는 경우 수사기관에서 CCTV를 샅샅이 뒤져 피의자의 이미지를 찾아내는데, 대부분 어두운 밤에 찍히거나, 화질이 나빠서 뭉개진 얼굴 이미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CCTV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꼭 무서운 음악을 빵하고 크게 들려주면서 용의자의 뭉개진 얼굴 이미지를 크게 한번 더 강조하곤 합니다. 그럴 때면 정말 무섭습니다...
덧3. 영화 <기기괴괴 성형수>를 보고 난 뒤,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오성대 작가의 웹툰 <기기괴괴> 시리즈를 몰아보고 있는데요. 너무 재밌네요. 현재까지 총 294화 연재되었는데, 주말동안 150화까지 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