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미국을 조명한 AMC 드라마 <매드맨>. 주인공 남성 돈 드레이퍼(존 햄)는 물려받은 유산이 없고, 가난한 시대 때문에 많이 배우지도 못했지만, 훤칠한 얼굴과 말발을 장기로 삼아 불우한 과거를 숨기고 뉴욕 매디슨 가 광고계를 주름잡는 플레이어가 된다. 조금 약은 데가 있고, 또 방탕하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그를 두고 비평가들과 팬들은 미국이란 신생 국가를 은유하는 인물로 해석한다. 특히나 드라마가 배경으로 삼은 60년대는 많은 영화와 미디어에서 미국적인 것의 원이미지로 호명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경제가 부흥했고 가난한 도심과 마당이 딸린 교외 주택이 거주 환경으로 자리 잡았으며, 문화적으로는 여성운동, 흑인 인권 등 다양한 인권 운동이 펼쳐졌으며,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등 미국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은 공동의 기억까지 만들어졌다. 1960년을 배경으로 시작한 드라마는 70년까지 생생하게 다루면서 이야기를 끝맺었다.(드라마 속 10년의 세월을 재현하기 위해 장장 8년에 걸쳐 방영됐다)
<매드맨>은 기본적으로 돈 드레이퍼(존 햄)에 대한 이야기지만, 페기 올슨(엘리자베스 모스)의 출근 첫날을 다루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시리즈를 돈 드레이퍼와 페기 올슨 두 사람의 이야기로 생각했다.
60년대 미국을 조명한 AMC 드라마 <매드맨>의 주연 배우 존 햄은 시리즈에 대한 인터뷰에서 이처럼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시리즈 자체의 진짜 주인공은 감히 페기 올슨이라 말할 수 있다. 아내를 배신하고, 다른 여성을 만나고, 가족에게 실망을 안기고, 회사에서는 엉망으로 굴다가도 간혹 멋진 능력을 발휘해 인정받는 남성 캐릭터 돈 드레이퍼는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자기 변주에 가까운 서사를 반복했을 뿐, 특기할 만한 서사는 없다시피 하다. 반대로 돈 드레이퍼의 비서로 첫출근했던 페기는 가장 낮은 위치에서 계속 성장을 일궈나간다. 돈 드레이퍼의 전화를 받고, 메모를 남기고, 남은 시간에 타이핑을 반복하는 비서였던 페기는 립스틱 광고를 준비하는 카피라이터들 사이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카피 쓰는 일에 발을 들이게 된다. 여직원들에게 립스틱 사용을 권해보고 카피를 뽑아보려고 했던 남성 카피라이터들에게 여직원들이 립스틱을 바르고 닦은 휴지가 담긴 바구니를 갖다 주며 “Basket of kisses”라는 표현을 쓰며 능력을 인정받은 뒤 몇 번의 기회를 더 얻어 정식 카피라이터가 된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줄 일터를 찾아 돈 드레이퍼를 떠난다. 요컨대 페기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귀신처럼 알아내며, 그를 위해 누구든 개의치 않고 떠나며, 자신을 위한 기회를 먼저 붙잡는다. 사랑에는 줄곧 실패하지만 남성 없이도 삶을 낙낙하게 꾸려나가는 여성 캐릭터다.
<매드맨>에서와 같이 배우 엘리자베스 모스는 늘 사랑에 실패한, 혹은 사랑의 불합리함을 목격하는 여성을 연기해왔다. 그러면서도 든든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여성으로 분했다. 스물여섯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매드맨>에서 그는 남성 중심의 질서 아래 편재된 사랑과 가족에서 비껴진 사랑에 도전한 뒤, 실패를 맛보고 미혼모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러고는 피날레 에피소드에서야 겨우 옅은 수준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미국 OTT 플랫폼 HULU의 온라인 독점 시리즈 <시녀 이야기>에서 엘리자베스 모스는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이 세운 길리어드 공화국에 감금돼, 아이를 출산하는 도구가 되길 강요받는 시녀 준을 연기했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세력을 조직하고 변화를 꾀하는 여성 리더가 되어간다. 영화 <인비저블맨>에서는 어떤가. 이혼한 뒤에도 전남편으로부터 지속적인 스토킹을 경험하는 공포스런 상황을 견뎌야 하는 여성이었으며,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셜리>에서는 유명 고딕 호러 작가이지만 남편의 잦은 외도를 겪어야 했던 셜리 잭슨으로 또 한번 변신을 했다.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 <셜리>
요컨대 모스는 늘 사랑의 실패를 겪는 인물을 연기해왔다.자유로운 싱글인 채로 연애의 즐거움을 이야기하거나 결혼으로 대표되는 정상가족 서사에 들어서면서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지 않고, 늘 그를 거부하는 서사를 재현해왔다. 드라마 장르는 물론 공포 장르 속에서도 사랑에 대한 서사나 결혼 제도에 함의된 여성 억압적인 서사를 그렸다. 이는 거칠게나마 배우 본인의 삶과도 얼마간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아역 배우 출신 엘리자베스 모스는 <매드맨> 시리즈에 출연하던 중 14살 연상의 코미디언 배우 프레드 아미슨을 만나 결혼하고 이혼하기에 이른다. <매드맨>의 동료 배우인 존 햄이 NBC 코미디 방송 <Saturday night live>에 출연할 때 짧게 무대에 섰다가 프레드 아미슨을 만났고, 2009년에 웨딩마치를 올렸으나 몇 개월 되지 않아 별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2011년에 이혼으로 결혼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때의 일이다. 거기다 사이언톨로지교 신도로서의 기이한 종교력도 손가락질 받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는 제인 캠피온과 같이 훌륭한 여성 감독과 드라마 <탑 오브 더 레이크>에서 만나 2014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2017년에는 자신이 이끌어가는 원톱 주연 드라마 <시녀 이야기>를 통해 골든글로브와 에미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크고 튀어나온 눈, 약간 굽은 매부리코, 작은 키에 조금 살집이 있는 몸. 엘리자베스 모스는 비교적 화려하지 않은 외모로, 영화-드라마 산업에 뛰어들어 착실히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그러면서도 기존에 여성에게 부여되어온 질서에서 비껴나가고, 그에 저항하는 여성의 얼굴을 연기해왔다. <매드맨>의 돈 드레이퍼가 개츠비에 이어 미국을 상징하는 메타적 캐릭터라면, 배우 엘리자베스 모스는 여성에 대한 모든 불합리함에 저항하는 얼굴 그 자체가 아닐까.
덧1. <매드맨> 시리즈를 정말 좋아합니다. 친구들이 <매드맨> 덕질을 아직도 한다고 놀리곤 하는데요. 2015년에 종영한 드라마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두 번에 걸쳐서 첫회부터 시즌7 마지막회까지 본 것 같네요. 좋아하는 몇몇 에피소드는 가끔 생각날 때 조금 보려고 켰다가 속절없이 1시간 내리 보곤 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서비스했는데, 최근 아마존프라임으로 서비스를 옮기면서 못 본 지 꽤 되었네요. 너무 재밌으니 한번은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제겐 미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어떤 좌표가 되어준 드라마입니다.
덧2. 프레드 아미슨은 과거 SNL에서 버락 오바마를 자주 흉내냈던 코미디언입니다. 얼굴을 보면 바로 아실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덧3. 그 유명한 <시녀 이야기>를 드디어, 이젠, 정말로(?) 봤습니다. 2017년 시즌1 방영 때부터 보려고 마음만 먹다가 미처 챙겨보지 못했었습니다. 최근 OTT 플랫폼 웨이브에 시즌3까지 모두 서비스 중이라서 편하게 보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달려서 일주일만에 시즌3 에피소드 3개를 남겨두고 다 보았네요. 역시나 추천합니다. 불합리함에 저항하는 엘리자베스 모스의 얼굴은 대단히 압도적입니다. 시즌3까지 고루 훌륭한 건 아니지만, 시즌1는 설정 묘사가 충격적이고, 시즌2는 잠시 주춤하는 것 같지만, 시즌3에서는 완전한 혁명 서사가 펼쳐지기 때문에 즐겁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