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2월 25일 저녁 7시(모스크바 시간) 소비에트 연방은 겉보기에는 평화롭게 몰락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대통령 세 명이 모여 문서 한 장에 서명하는 것으로 연방은 소멸한다. 소비에트 인민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러시아란 새로운 국가에서 외국인이 된 듯한 경험을 한다. 영화, 슬로건, 문학 등을 통해 상상적으로 공유했던 공동체 의식은 빠르게 폐기해야 할 가치가 됐다. 미국에서 연구 중인 러시아 학자 알렉세이 유르착은 당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련 사람들은 그 누구도 소련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이미 스스로가 그러한 변화를 위한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소련 사람들은 매우 빨리 이러한 변화에 스스로를 적응시켜 갔다. 이때 이러한 예상하지 못한, 그러나 놀랍지는 않은 일련의 변화들은 곧 소비에트 시스템의 본질에 놓여 있는 독특한 패러독스를 드러낸다. 수년간 소비에트 시스템은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살아내기 위해 애써왔다. 그것은 영원했지만 점점 쇠락하고 있었고, 활기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황량했다. 그것은 숭고한 이상에 바쳐진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이상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중 어느 한쪽이 위선적이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고 심지어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다.”
러시아 문화학자 미하일 엡쉬타인은 소비에트 연방 붕괴로 인한 ‘탈공산주의 사회’를 ‘미래 이후After the Future의 사회’로 본다. 공산주의 사회가 이미 ‘미래 사회’이기 때문에 소비에트 붕괴는 인간의 정념과 상상을 뛰어넘는 ‘더 먼 미래’라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블라디미르 푸틴이 정권을 잡는 2000년대가 되기 전까지 러시아 땅은 그야말로 아노미 상태에 빠진다. 서구의 안티테제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존립의 근거를 찾았던 소비에트는 붕괴 이후 바로 그 타자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1990년대 말에 이르면 자본주의로의 이행도 사실상 실패한다. 루블화는 끝없이 폭락했다. 궁여지책으로 1998년 1월 1일부터 화폐 가치를 1000배 올리는 개혁안이 강행된다. 경제는 계속 나빠졌고 그해 8월 채무불이행을 뜻하는 모라토리엄이 선언되었다. 숨 가쁜 러시아 현대사는 이듬해 1999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탄핵안을 소추하고, 그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옐친의 돌연 사임을 맞이한다. 포스트소비에트인들은 옐친 사임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맞이하며 21세기를 열었다. 혼란의 시기에 익숙한 ‘지도자-아버지’ 이미지를 차용한 푸틴은 어쩌면 포스트소비에트인들에게 당연한 선택지였는지도 모른다. 국영산업들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소수의 재벌, 일명 ‘올리가르히’가 탄생했는데 푸틴은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즈뱌긴체프는 포스트소비에트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이다. <리턴>을 만들었던 배경에는 2000년에 시작된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가 자리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최근작이자 다섯 번째 장편 영화 <러브리스>가 개봉한 2019년 현재까지도 푸틴은 여전히 대통령 자리에 올라있다. 물론 역사의 조건들이 영화라는 예술을 결정짓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 비평은 평자가 ‘역사적 문제의식’을 품은 채 작품과 대면하는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이같은 태도는 역사적 확증이나 실증주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벤야민이 밝힌 ‘역사의 개념’을 견지한 비평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 비평에서 역사가 유일한 답안처럼 굴어선 안 되겠지만 영화란 매체를 통과하며 산란하는 역사의 조건들을 감지할 수 있다. 실제로 즈뱌긴체프의 영화는 해가 거듭될수록 ‘상실’이란 테마에 묶여있다는 점을 비평적으로 발견하게 되며, 관객은 그의 프리즘을 통과하는 러시아의 역사적 조건들과 마주친다. 즈뱌긴체프는 인터뷰를 통해서 “조국 러시아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의 영화는 늘 러시아 사회와 종교, 경제를 이야기해왔다. 심지어 <러브리스>는 “러시아여 어디로 가는가”라는 니콜라이 고골이 남긴 질문에 일종의 현재적 답을 보여준다.
즈뱌긴체프의 초기작 <리턴>(2003), <추방>(2006)에서는 새로운 ‘지도자-아버지’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이중적인 감정을 영화적 정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강력한 아버지가 아들 세대를 이끌어주길 바라는 한편, 아들 세대가 아버지를 미워하는 포스트소비에트 세대의 ‘진실한 이중성’에 집중한다. <리턴>과 <추방> 속 아버지는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가족 전체를 좌지우지하거나, 가족 구성원을 내치는 오만한 결정권자로 그려진다. 1990년대의 공백기를 제외하고 러시아에서는 강력한 남성 지도자에 의한 ‘권력에의 예속’이 사실상 반복돼 왔다. 이러한 ‘역사적 문제의식’에서 보면 즈뱌긴체프의 아버지들은 비이성적인 캐릭터가 아닌 해석가능한 텍스트가 된다. 시간이 흐른 2010년대 즈뱌긴체프의 영화는 희망이 사라진 황량한 세계로 변한다. 주지하다시피 푸틴의 집권도 장기화한다. <엘레나>(2010), <리바이어던>(2015), <러브리스>(2019)는 포스트소비에트 세대가 처한 러시아의 현실을 공허하게 그리며 가족 상실의 내러티브를 변주하고 반복한다. 이때의 ‘가족 상실’은 원인과 결과가 합치된 채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다. 예를 들면 <러브리스>에서 알로샤가 사라지는 건 부모 이혼으로 아이의 존재가 짐이 되었기 때문인데, 부모들은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나락으로 떨어진다. 가족이 상실되어서 아이가 사라진 것인가, 아이가 사라졌기 때문에 가족이 상실된 것인가. 즈뱌긴체프의 카메라는 원인과 결과가 합치된 가족 상실을 그리면서, 남은 자들이 겪는 허무함을 집요하게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언제나 수사물이 아닌 드라마 장르가 된다.
즈뱌긴체프는 그러나 상실 이전의 삶도 아름답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짚는다. 그의 영화는 공식처럼 차갑고 비인격적인 자연을 바라보면서 시작하고 같은 곳을 비추며 끝낸다. 미니멀리즘 음악과 함께여서 더욱 냉정하고 차갑게 느껴진다. 영화는 상실 이후 관성으로 지속하는 삶, 가족 이외의 사회적 관계가 불가능한 삶, 자본주의에 예속된 삶을 예감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렇다고 상실 이전의 삶을 충만하거나 희망적인 것으로 그리면서 낭만화하지 않으며 <리턴>, <추방>, <엘레나>, <리바이어던>, <러브리스>에서 각각 아버지, 아내, 재혼 남편, 재혼 아내, 어린 아들을 상실하기 전에도 즈뱌긴체프의 풍경은 언제나 황량했다.
0. 졸업 때 러시아 영화로 소논문을 썼다. 몇년이 흐른 뒤 다시 뒤적여보니 '잘 알지 못하는 이론'을 여기 저기 인용해서 적잖이 놀랐다. 들뢰즈의 '앙띠 오이디푸스'가 이 러시아 영화들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이론적 강박이 있었는데, 그땐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이론들을 걷어내고 지금의 내가 읽어도 그런대로 수긍할 수 있는 것들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