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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미 Jan 17. 2020

에릭 로메르 <수집가>(1967) 리뷰

소리만큼은 아무것도 속이지 못한다


  에릭 로메르는 ‘여섯 개의 윤리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같은 구조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다루었다. 여성 한명과 남성 두 명, 혹은 여성 두 명과 남성 한 명으로 구성된 세 사람을 등장시키고, 남성 캐릭터에게 내레이션을 맡겨 그의 내면을 소상히 들려주는 것이 공식화되어 있다. 또한 영화의 중심이 되는 내레이터가 안정적인 사랑과 일탈적인 사랑을 저울질하다가 결국 옛 연인에게 돌아가는 결말까지 동일하다. 그의 반복되는 주제를 두고 제임스 모나코는 ‘구애적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구애적 사랑’이란 8세기 전 프로방스 음유시인들이 읊었던 이야기의 주제로, 이성의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사색하는 데에서 오는 고통스런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나친 사색은 내레이션을 통해 잘 드러난다. ‘여섯 개의 윤리 이야기’의 세 번째 작품인 <수집가>도 예외가 아니다. 관객들이 아드리앙의 내면의 소리를 계속해서 듣게 되는 건, 결국 하이데를 향한 지나친 사색이요 환상인 것이다.


  내레이션 외에도 여러 가지 소리가 혼재해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파도 소리 등의 '자연의 소리'우선 들린다. 그리고 이륙하는 비행기 소리로 추정되는 '소음'반복해서 들려온. 전자와 같은 소리를 두고 미셸 시옹은 고정된 듯 보이는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고 있다는 것 드러내는 소리라고 해서 ‘시간을 지향하는 짧은 역사’라고 정의했다. 실제로 <수집가>에서 녹색의 숲, 만발한 들꽃, 맑은 바닷물의 이미지는 시간이 멈춘 전혀 다른 세계로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자연의 소리를 이미지의 보완물이나 부차적인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작품에서 오직 이 소리만이 평화로운 휴양 속에서도 시간은 쉬지 않음을 드러내는 유일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온다면 행기  단 세 번만 등장한다. 아드리앙이 연인과 함께 있을 때, 아드리앙이 하이데를 처음 만났을 때, 하이데와 다니엘이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이렇게 세 번뿐이다. 화면에는 소음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시간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반복되는 소음은 무엇인가. 결국 아드리앙이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불안한 내면을 지녔다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주관적 소리’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공식에 따라 아드리앙이 옛 연인이 있는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예약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어쩌면 런던행 비행기는 작품 초반에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드리앙은 언제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반복해서 등장하는 비행기의 소음은 이러한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조성한다. 영화 음악은 감정을 증폭시키거나 화면이 불연속적으로 편집되더라도 감정을 이어가는 역할을 한다. <수집가>는 영화음악을 포기한 대신 앞서 말한 여러 소리들로 그 역할을 대신한다.


  아드리앙의 ‘주관적 소리’는 온갖 생각들과 불안함으로 가득 차있는 내면을 표상한다. 바깥으로 내뱉는 말이 거짓이고 위선일지언정 내면의 소리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었다. 외부로 향한 그의 말들은 논리적이고, 지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내면의 소리는 다르다. 내면의 소리만큼은 아무것도 속이지 못한다.




덧. 추운 겨울입니다. 여름 날의 랑데뷰를 다룬 <수집가>에 대한 기억을 꺼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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