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의 기술
아까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려면 대인관계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안에서는 의사소통을 하는 요령이 대부분을 차지해요. 그 안에서도 잘 듣는 게 제일 중요하구요. 그래서 ‘잘 듣는 사람이 친구가 많다.’, ‘귀가 두 개고 입이 한 개인 것은 듣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죠. 상담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일이라고 하기도 하구요.
근데 듣기만 하는 대화가 있나요? 앉아서 친구가 만든 소리의 진동이 귀구멍을 통해 달팽이관을 지나 청각피질로 자연스레 들어가도록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될까요? 그건 이상하잖아요. 결국 잘 듣는다는 것도 무언가 반응을 한다는 거 아닌가요? 결국 우리는 이걸 ‘능동적 듣기’라고 해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대에게 무언가 애를 써서 행동을 해 주어야 한다는 거에요. 그니까 상담이 남의 말을 잘 들어주기만 하는 일이라는 게 옳긴 하지만 별로 정보가 없는 말이에요. 마치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좋은 학생이다.’라는 말이랑 똑같은 거에요. 아무런 교훈이 없는 문장이잖아요.
우리는 보통 대화를 ‘정보의 교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익한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듣는 행동이라구요. 이런 착각에 대해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저자 존 그레이는 남성은 ‘미스터 수리공’ 여성은 ‘가정진보위원회’ 역할을 하려고 한다고 비평했습니다. 남자는 상대가 고민을 이야기할 때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고, 여성은 상대에게 잔소리를 해서 고치려고 든다는 것이죠. 저는 이 책을 모든 인간은 성별과 상관없이 실질적인 도움을 상대에게 주려는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했지요.
하지만 같은 책에서 이런 태도가 오히려 대화의 단절을 가지고 왔다고 보았지요. 다들 자신의 존재와 감정을 인정받고 싶어서 고민을 말하는 것이거든요. 충조평판을 하지 말자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구요. 저는 대화는 사랑과 인정의 욕구를 말의 형태로 나누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을 인정해주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듣기 방법인 것이죠. 그러면 결국 듣던 사람이 적절한 반응을 하면 말의 주고받기가 되는 것이죠. 그게 의사소통이에요.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눈을 맞춥니다. 눈을 피하면 그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요. 몸도 상대에게 살짝 기울이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전달됩니다. 여러분, 보통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면 ‘씹는다’라고 표현을 하던데 그게 대화에서는 최악의 반응이잖아요. 상대의 말에 대답을 생각해내기 어렵다면 꼭 언어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표정의 변화를 주는 것으로 충분히 ‘잘 듣고 있다’라는 신호가 되니까요.
의사소통이 정보교환을 주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상대를 수용하게 됩니다. “난 우리 부모님이 죽었으면 좋겠을 정도로 미워!”라는 말을 친구가 한다고 해 보죠. 이 때 “그래도 부모님에게 그런 마음 품으면 안 되지.” 라든가 “부모님을 해치는 건 나쁜 행위야.”라고 말을 하면 그냥 보편적인 도덕원칙인 정답을 가르치는 것이죠. 근데 친구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단순한 윤리를 모를까요? 그토록 화가 났던 상황에 대해 전달하고, 그때 느꼈던 감정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게 목적이겠죠. 이 목적에 맞게 행동하면 의사소통을 잘 하는 사람이 됩니다. 극단적인 상황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종류의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상대가 구체적으로 궁금한 것을 물을 때는 내가 아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간섭과 개입 대신 수용과 공감을 바라듯, 상대도 항상 그렇습니다. 이걸 매 순간 자각하는 것이 의사소통 기술 중 잘 듣기의 기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