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심리학으로 보는 감정
제가 상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인류라는 종은 과거에...‘라는 단서를 달아서 정서의 기원에 대해 설명했었죠. 이 책이 고고학을 다루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인간은 동물이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었구요. 최근에는 많은 심리학자들이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특성이 어떤 측면에서 과거에 생존에 도움이 되었는지 탐구하는 거죠. 그러면 현대사회에서는 불편하기만 한 정신적 장치가 옛날에는 필요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생존과 번식에 성공한 동물의 자손입니다. 그렇지 못한 생물종들은 이미 예전에 대가 끊겼지요. 굶거나 혹은 잡아먹혀서 멸종된 거죠. 최초의 유인원 화석은 수백만년 전에 나타났지만, 인간이 온 지구를 지배한 것은 만 년도 되지 않습니다. 그 전에는 인류도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안에서 치열하게 경쟁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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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흔적이 ’투쟁 및 도피반응‘ 시스템입니다. 화가 치밀거나 너무 공포스러울 때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느낌, 정말 많이 겪어 봤죠? 이 때 심장이 뛰는 건 몸에 혈액을 많이 공급하기 위해서입니다. 피에 영양분하고 산소가 들어 있으니까요. 이때 동공(눈구멍)도 커지구요, 땀도 나기 시작하고, 근육도 부풀어 오릅니다. 위기상황이란 크게 두 가지에요. 나보다 강한 상대를 만났으면 도망가야 하고, 나보다 약한 상대를 봤으면 맞서 싸워야 합니다. 분노는 투쟁의 정서이고, 공포는 도피의 정서입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 더 빠르고 강하게 활동할 수 있게 몸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에요.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했던 기능이죠. 이런 신체적 긴장을 교감신경계 반응이라고 해요.
생물학적 인간은 그대로이지만,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호랑이나 사자한테 쫓기지 않아요. 창을 들고 사냥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죠. 그렇게 분노해야 할 일도, 공포를 경험해야 할 일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서는 남아 있어서 누굴 공격해야 할 상황도 아닌데 화가 나고, 내 생명을 위협하지도 않는 대상에 공포를 느낍니다. 이런 정서는 이제 생존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괴롭게만 합니다.
불안은 공포의 만성화된 상태입니다. 언제든 위협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낮은 수준의 공포 상태에 머물러 있는 거죠. 그리고 인간은 불안을 일으키는 대상을 피합니다. 흔하게는 청중 앞에서 발표하는 상황, 직장 상사, 동갑내기 이성, 밀폐된 장소 등이 불안의 대상이 되죠. 그러면 일상이 엄청나게 불편해집니다. 발표수업이 있을 때마다 전날 근심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는 것처럼 말이죠. 완전히 이성을 잃거나 기절할 정도가 되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분노는 내 권리를 침해받는다고 생각될 때, 혹은 존재가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 인간관계 혹은 재산상 손해가 있을 것 같을 때 일어납니다.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이전처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상황은 거의 없습니다. 과거에 개인이 힘겨루기를 통해 사적으로 해결하던 시시비비를 이제는 사법 기관에 위임을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은 재산을 완력으로 빼앗기면 경찰을 부르고 사기를 당하면 소송을 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화를 이기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하거나 상해를 입히면 오히려 처벌을 받게 되죠. 물론 불의를 향해 분노하는 인간의 특징이 투쟁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는 하지요. 그러나 일상에서의 분노는 보통 적응에 도움이 안 되죠.
참 역설적이죠? 우리가 동물로서 생존에 도움을 주었던 시스템이 이제 오히려해를 끼친다는 게 말이죠. 하지만 이 조건 안에서는 부정적인 정서를 조절하면서 현실에 적응해 살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다음 절에서는 불안 조절에 관한 내용을 설명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