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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 Feb 10. 2024

죽음 -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죽음을 마주했던 것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다. 그전에도 부모님을 따라 누군가의 장례식장에든 갔겠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느 친척 어른의 장례식장에서 멋모르고 뛰어다녔던 기억은 어렴풋이 있지만, 죽음이 무엇인지도, 죽음을 맞이하는 주변 이들의 분위기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장례식장 평상 위를 뛰어다니던 기억이 남았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죽음은 사람이 아닌 동물의 것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급식을 먹지 않던 나이었으니 열 살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뜬 점심 무렵이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 옆 모퉁이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두려움 섞인 소리를 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들 중에 낯익은 얼굴이 하나 보였다. 그때는 정말 같은 동네에 살면 누구나 친구이던 때였고, 겁이 많은 만큼 호기심도 많았던 어린 나는 스스럼없이 그들 사이로 “나도 볼래, 나도” 하며 비집고 들어갔다.


 그들에게 다가간 것은 실수였다. 그것도 큰 실수였다.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던 것은 또래보다 조금 더 큰 남자아이였다. 그는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무언가를 마구 헤집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채지는 못했다. 허리를 살짝 굽히며 들여다본 나는 단말마를 지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물이 왈칵 나와 눈에 고였다. 빨갛고 노란색이 섞여있던 그건, 일부러 가해진 공격에 상처 입고 죽어가던, 아니 어쩌면 이미 죽어있던 병아리였다. 남자아이는 미동 없는 병아리를 나뭇가지로 마구 쑤셔댔고, 그 옆에는 무섭다며 칭얼대는 아이와 ‘날개도 뜯어봐’하며 부추기는 아이들이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알게 된 순간 더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옆에 아이들을 비집고 나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놀람인지 두려움인지 어쩌면 흥분인지 모를 감정을 안고 집으로 가던 길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물이 줄줄 흘렀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보았다. 책이나 티브이에서만 보던 죽음과는 많이 달랐다. 총성과 함께 ‘으악’ 하며 쓰러지던 티브이 속 죽음들은 나뭇잎이 떨어지거나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이야기의 흐름 속 한 장면에 불과했고, 그다음 장면에서 이어지는 오열과는 달리 어떠한 정서적 동요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병아리의 죽음은 내 일상에 처음으로 던져진 돌이었고 그 순간의 내 호흡에 녹아든 날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해나 지났을까, 매일 밤 듣던 라디오에서 그룹 넥스트의 ‘날아라 병아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어린 내 눈에 처음 죽음을 보았던, 1974년의 봄을 아직 기억한다.’라는 신해철의 목소리에 내가 처음 보았던 병아리의 죽음을 떠올렸다. 짧은 안테나 탓에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인 노래를 들으며 그날 병아리를 해친 아이의 심리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했다. 호기심이었을까. 천진난만함을 가장한 잔혹함이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어쩌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잔인한 악마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닿았다. 도덕 시간에 얼핏 배운 성선설과 성악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학교 앞에는 가끔씩 병아리장수가 오곤 했다. 종이 박스에 병아리가 한가득 담겨서 쉴 새 없이 삐약거렸고, 하굣길의 아이들은 방앗간을 지나지 못하는 참새처럼 종이 박스를 둘러 쪼그려 앉아 한참을 구경했다. 병아리의 가격은 500원. 라면 한 봉지와 비슷한, 한 생명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저렴한 가격이었다. 과자 사 먹을 용돈을 아껴 병아리를 들고 집에 간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혼이 났다. 개중에는 종이박스에 전구를 넣어 병아리를 잘 기른다는 아이도 있었다. 닭이 될 때까지 키운 아이도 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정말로 본 적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개체 수를 맞추려거나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은 폐사시키던 병아리들을 얻어서 싸게 팔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의 생명에 500원이라는 터무니없이 저렴한 값이 매겨진 순간 생명의 무게를 아직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학이 새겨진 동전 한 닢으로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 갖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소중하게 아끼며 애지중지 기르려던 아이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값을 지불하고 산 목숨이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병아리들은 닭이 되었든 되지 못했든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잘 자랐어도 어딘가에 처분되었을 것이다. 도시의 주택단지는 병아리가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니니. 병아리를 샀던 아이들은 모두 하나의 죽음을 겪었을 테다. 그 죽음은 그들 각자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서른 남짓 살며 여러 차례의 죽음을 목격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부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죽음까지 끊이지도 않고 어딘가에선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다. 결혼식에 다니는 것은 너무나 익숙해져서 언제쯤 도착해서 어떤 얼굴로 사진을 찍고 밥을 먹을지 청첩장을 받는 순간부터 몸이 반응을 하는데, 장례식에 가는 일은 여전히 어떤 얼굴로 유족과 인사를 나누고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낯설기만 하다. 매 죽음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고, 장례식장은 저마다 살아온 삶과 그 삶을 새긴 이들이 모두 모인 주마등 같은 공간이었다. 살면 살수록, 알면 알수록 죽음은 그리고 생명은 무겁기만 하다.


 서른 즈음되니 죽음을 대하는 주변의 태도가 눈에 더 들어왔다. 스물 즈음에 죽음을 이야기할 때에는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는데, 이제는 누가 어떻게 세상을 떴고, 무엇을 남겼는지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주식이 올랐다거나 전날의 야구경기에서 어느 팀이 이겼다는 이야기처럼 누군가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의 대화에 오르내린다. 죽음은 주식시장이 열리고 야구 시즌이 개막하는 것처럼 일상 속에 늘 벌어지는 일이 되었다. 연예인 A 씨의 죽음에는 많은 이들이 울부짖는데, 동네 구멍가게 B아저씨의 죽음에 눈물짓는 것은 주변이들 뿐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인데,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죽음의 무게가 모두 다르다.


 몇 해 전, 불과 3개월 간격으로 연달아 죽음을 겪은 적이 있다. 존경하고 따르던 리더가 갑자기 세상을 떴고, 이별의 황망함과 상실감을 극복하기도 전에 10년 넘게 함께 하던 반려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두 차례의 이별 모두 내게는 큰일이었다. 몇 년을 후유증에 시달렸고, 아직도 이따금씩 밀려드는 그리움에 눈가가 시큰거리고는 한다. 아직도 술에 취하면 그들이 보고 싶어 휴대폰의 사진 갤러리를 뒤적이고,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들을 만날 때는 그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꺼낸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내가 겪은 이별은 늘 있는 여러 죽음 중 하나였다. 알려진 죽음과 알려지지 않은 죽음 모두 그랬다. 그들을 가볍게 이야기하고, 때로는 죽음 자체를 농담이나 가십거리로 소모하기도 했다. 그 앞에서 화를 내거나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고 참는 나의 사회적 자아를 보며 자괴감이 들 때도 가끔 있었다. 내게 귀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것일 수 있음을 안다. 아주 잘 안다. 그럼에도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별개의 문제임을 늘 느낀다.


 내게 직접 와닿는 죽음들을 경험한 후에 생긴 몇 가지 변화가 있다. 그중 하나는 어디선가 다뤄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글이나 영상 속 가상의 죽음이라 해도 죽음까지 이르는 과정과 그 뒤에 남겨진 이들의 감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이들과, 비정한 인간들로 인해 서럽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오늘도 생각한다. 죽음의 무게만큼 생의 소중함을 되새기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버거움 속에 타인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따금씩 잊고 지내고 만다. 언젠가 다가올 나의 죽음까지 몇 번이나 더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게 될까. 언제쯤이면 그 이별의 순간들이 무뎌질 수 있을까. 하나하나의 생이 가진 깊음을 이제 슬슬 알아가는 나이이기에, 언제까지고 무뎌지지 않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러니 다들,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내 곁을 떠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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