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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 Mar 30. 2024

삶은 여행- 예상치 못하기에 더 기대됩니다.

 내게는 역마살이 있다고 했다. 동네 아줌마들을 따라 어느 역술인을 만나고 온 엄마가 들려준 얘기다. 돌아다니는 걸 너무나도 싫어하던 게으른 어린 나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했다. 집 앞 슈퍼에 과자 사러 나가는 것도 귀찮아하는 사람한테 역마살이 가당키나 하냐고 물었다. 그 말조차 드러누워서 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그건 그렇지?” 하며 웃었다. 집에 있을 때도 앉아있기보다 누워있기를 좋아하고, 누가 밥을 사준다고 해도 나가는 게 귀찮아서 고사하던 나를 생각하면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른 즈음이 되어 보니, 그 역술인은 제법 용했다.


 본가를 떠나 혼자 살게 되면서 삶에 다양한 변화가 생겼다.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와 다른 남들의 삶을 보게 되면서 더 많은 경험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쉽게 말하자면 남들 다 하는 일을 나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중 하나는 그렇게 세상이 넓다 하니, 넓은 세상을 내 눈으로 한 번 보자는 생각이었다. 처음 그 결심을 실행으로 옮긴 것은 새내기 시절 처음 맞이한 방학에 갑자기 떠난 기차 여행이었다.

    



 ‘내일로’라는, 철도공사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내놓은 일종의 기차 자유이용권이 있었다. 요즘은 가격도, 사용 기간도 바뀌고 연령제한도 없어진 것 같지만, 그때의 내일로는 25세 미만의 청년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5만 원가량의 저렴한 가격에 일주일 간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끊고 젊음 하나만 믿고 무작정 기차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매력에 대학 시절에만 즐길 수 있는 낭만이나 버킷리스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각자가 다녀온 여행의 일정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서점에 가면 돈을 아끼며 여행을 즐기는 팁과 다양한 코스를 제안하는 여행서적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청춘이라는 말에는 생각지 않았던 일을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몰아세우는 묘한 힘이 있다. 이전 같으면 절대 생각하지도 않았을, 제대로 된 숙소도 아닌 찜질방에서 잠을 청하고, 정해진 좌석도 없는 기차에 몸을 싣고, KTX도 아닌 새마을이나 무궁화호를 타고 몇 시간씩 걸려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스스로 떠나게 만든 것이 청춘의 힘이었다.


 친구 둘을 꼬드겨 무작정 티켓을 샀다. 서울에서 만나 출발한다는 것 외에는 정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날의 일정은 그날의 기차에서 정하기로 했다. 막 성인이 된 청년들은 궁금한 것도 많았고 모르는 것도 많았기에, 말로만 들었던, 그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것들을 실컷 보고 맛보는 것만 목표로 했다. 첫 목적지로 정한 곳은 일출 명소로 유명한 동해의 정동진. 해가 뜨는 걸 볼 생각은 아녔지만, 서울에서 출발해 국토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보자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여행이란 건 다양한 변수가 생기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이동하는 수학여행이나 부모님이 계획을 다 세워둔 가족여행만 다닐 때는 알 수 없던 사실이다. 무궁화호는 생각보다 더 많은 역에 자주 멈췄고, 급하게 기차에 타느라 먹을 것을 챙기지 못하고 출발했더니 경기도를 빠져나가지도 전에 허기가 몰려들었다. 충동적으로 다음에 도착하는 역에서 내려서 식당을 찾기로 했다. 움직이는 기차에서는 휴대폰 인터넷이 잘 잡히지 않았고, 관광지 위주로 쓰인 책에는 정보가 있는 지역보다 없는 지역이 훨씬 많았다. 계획에 없던 일을 한다는 생각에 묘한 설렘이 솟았다. 다음 역은 용문역이었다.


 용문역은 컸다. 새롭게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번듯하고 깔끔한 역사를 벗어나니 역과 어울리지 않은 낡은 주택 위주의 작은 도시가 펼쳐졌다. 관광지도나 책자 같은 것을 찾아보려다 포기하고 역을 나와 걸으니 채 100m를 지나지 않아 아주 허름한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능이버섯국밥이라 적힌 손으로 직접 쓴 간판이 걸려있었고, 가게 앞 공터에는 플라스틱 박스에 쌓인 여러 종류의 버섯들이 놓여있었다.


 기웃거리며 메뉴판을 보는데 오만 원짜리 백숙은 엄두를 내지 못해도, 한 그릇에 오천 원 가량 하는 버섯국밥은 여행의 시작을 장식하는 괜찮은 식사가 될 것 같았다. 서로를 보며 눈을 마주친 친구들과 고개를 끄덕인 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연통이 달린 난롯가에 앉은 중년의 사장님이 보였다. “젊은 친구들이 이런 데는 어떻게 알고 왔느냐” 묻던 수더분한 사장님께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하는 참이라며 무작정 들어왔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를 보이며 멋쩍게 웃는 우리에게 사장님은 아무 데나 앉으라는 말을 툭 던지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잔뜩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장님이 가스버너를 들고 나타났다. 기왕 먹을 거면 좋은 걸로 먹어야 한다며, 국밥 값만 받을 테니 버섯전골에 막걸리나 한 잔 하고 출발하라 했다.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니 가격이 두 배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호의에 당황했다. 온갖 버섯과 고기가 듬뿍 담긴 전골은 만 얼마를 주고 먹기에는 과분해 보였다. 죄송해서 안 된다고, 전골 값을 다 내겠다는 우리에게 사장님은 사람 성의 거절할 거면 아무것도 먹지 말고 나가던가, 그냥 주는 대로 맛있게 잘 먹으라고 말했다.


 막걸리 한 병을 나누어 먹고, 전골에 죽까지 야무지게 끓여 먹고 나선 우리는 취기가 돌아 발그스레한 얼굴로 다시 기차에 탔다. 텅 빈 매점 칸에 쪼그려 앉아 잠을 청하고, 새벽 무렵 도착한 정동진에 내리니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역 근처는 가득했다. 그날은 흐렸다. 해안가에 앉아 캔 커피를 마시며 해가 뜨길 기다렸지만, 시커멓던 하늘이 환하게 맑을 때까지 일출은 볼 수 없었다. 기대처럼 떠오르는 해와 함께 여행을 시작하진 못했어도, 첫날 첫 식사부터 좋은 곳을 발견하고, 좋은 대접을 받았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출발이 아니냐며 함께 웃었다.


 그렇게 시작한 여행은 동해안을 따라 영남으로 갔다가, 호남을 거쳐, 충청에서 끝났다. 거의 모든 곳이 처음 가는 곳이었고, 찜질방이나 낡은 여관방을 찾아다니며 숙박비를 아껴 조금이라도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려 했다.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 달린 것도 여러 차례, 뜨거운 여름 날씨에 지쳐 가려다 포기한 도시도 있었다. 거의 매일 술에 취해 노래를 함께 흥얼거렸고, 한국인과 외국인을 막론하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았다. 일주일을 꽉 채운 여행은 아주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첫 행선지에서의 첫 식사였다.




 그 뒤로 나는 자주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았다. 돈이 없어도 시간이 나면 하루에 몇 대 다니지 않는 버스를 타고 낯선 곳으로 향했고, 돈을 조금 벌게 된 후에는 해외여행에 도전하기도 했다. 여행뿐 아니었다. 혼자 살며 작은 자취방들을 전전했고 잦은 이사에 짐을 싸서 돌아다니는 삶은 익숙해졌다. 자연스레 삶의 터전도 대여섯 차례 바뀌었다. 내게 역마살이 있다던 그 무속인의 말은 (내가 초자연적인 것들을 믿지 않기는 하지만) 정확했던 셈이다.


 가수 이상은의 <삶은 여행>이라는 노래가 있다. 술에 취하면 종종 흥얼거릴 정도로 좋아하는 노래다.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살아보니 삶이란 정말 그렇다. 인생은 여행과 비슷한 게 많다.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에 설레는 마음도, 때로 마음먹고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것도, 그 과정에서 다양한 변수가 생기는 것도 그렇다. 변수들은 때로 기쁘고 좋은 것이기도 하고, 슬프고 당황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일주일의 짧지 않은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그 식당에서의 일이 오래도록 인상 깊게 기억되는 이유는 뭘까. 비슷한 감흥이라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기에 다른 경험들보다 크게 와닿았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 정하고 짜 준 것이 아닌, 처음으로 직접 선택해서 떠났던 길이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서프라이즈 파티가 더욱 즐겁고, 9회 말 역전 홈런이 더 짜릿한 법이니까.


 삶은 해피엔딩으로 정해진 동화가 아니다. 삶이 여행이라면, 역마살은 모두에게 있고,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삶도 언젠가 끝을 맞이한다. 변수로 가득해 끝조차도 예상할 수 없는 삶이지만, 그렇기에 언젠가 더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다가오길 기대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용문역 앞의 그 식당이 다시 어느 순간에 나타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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