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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스꾸 Jan 25. 2023

점점 여물자

인터뷰어 윪 / 포토그래퍼 호호



* 성균관대학교 은강 과의 인터뷰입니다.






垠江


    언덕 위에서 마르지 않고 졸졸 흐르라고 지어주셨어요. 이름 따라 살래요. 물결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곧잘 흔들려도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요. 물처럼 자연스럽게 사는 게 제일 쉬워 보여도 가장 어렵잖아요. 살다 보면 벽에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겠지만, 벽과 맞서 싸우는 대신 벽을 유들유들하게 만들어 유영하고 싶어요. 


    물을 자주 그려요. 물기 있는 재료들을 애정해요. 먹 냄새가 좋아 고등학생 때부터 동양화를 전공할 만큼. 근데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는 부족할 정도로 잘 그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대학 들어오니 내가 정말 붓을 드는 사람인지 고민되더라고요. 스무 살, 연례행사처럼 누구든 겪는 고민이었겠죠. 그 무렵 처음으로 나의 모양을 떠올렸어요. 그전까지는 나를 어떤 모양으로 비춰야 이해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면, 그땐 사소한 내 취향부터 내 관계까지, 내 자체를 그렸어요. 나는 어떤 맛에 끌리고 무엇을 그리워하고 난 어디서 힘을 받고 주는지. 나와 예술, 나와 사람, 나와 나에 대하여.


그땐 날 다 알 것 같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요. 샤워할 때 여러 생각이 오가면 날 알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잖아요. 근데 물기를 털고 나오면 머리가 새하얘지죠. 그런데도 물기가 닿았던 따뜻함이 좋아서, 내 모양을 알아가는 건 무의미하고도 의미 있어요.






    계절마다 찾는 호수공원이 있어요. 사색을 자주 하는 애정하는 공간인데요, 똑같은 장소가 김훈 작가의 산문에 등장해요. 읽고 많이 놀랐어요. 예를 들어 그곳에서 저는 가을의 한 풍경을 보는데, 그분은 삶을 보시더라고요.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그 깊은 시선에 슬펐어요. 막연하게 혜안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원래 애쓰는 성격은 아닌데, 보는 것만큼은 정말 치열하게 봤어요. 풍경이든, 예술이든, 사람이든. 


    20대 한국인 여자의 시선 너머 최대한 다른 세대의, 삶에 부딪힌 세월이 오랜 사람들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학내 노동자분들이나 교내 구성원분들을 주로 인터뷰했어요. 학교라는 같은 공간을 다르게 꿰뚫는 시선들이니까.



인터뷰이를 어떤 시선으로 보았나요?


    있는 그대로 바라봤어요. 어설프게 공감하기 싫었어요. 그 사람의 삶이 제 시선으로 매몰되지 않도록 최대한 많이 묻고 들었어요. 특히 감정을 물었어요. 제가 섣불리 행복했겠거니 슬펐겠거니 판단하지 않으려면, 그분에게 직접 들어야 했어요. 또 사실보단 감정으로 기억하는 이야기가 훨씬 많으시더라고요. 그런 감정은 인터뷰이의 언어, 표정, 몸짓, 머뭇거림 등을 통해 드러나요. 


    그러다 보니 언어로만 쓰인 인터뷰 글에는 공백이 생겨요. 독자들이 보는 건 글과 사진뿐이니 깔끔한 글을 위해 공백을 메우고자 한 적도 있죠. 그러나 점차 남겨두는 법을 배웠어요. 그 간극에는 글에 대한 욕심 대신 그분에 대한 진심이 남았으면 해서.


    인터뷰어라는 이름을 잠시 빌렸다가 제자리에 두는 느낌이에요. 이 이름으로 지나가는 인연을 잠시 붙잡을 수 있었고, 차마 걸기 어려운 말도 열 마디 말로 할 수 있었어요. 마음에 박히는 한 마디들도 많이 얻었어요. 휴스꾸가 제게 딱 맞는 옷은 아닐지라도, 가장 어울리는 옷이었다고 생각해요.






늘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라고 답했어요.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도 나예요. 



『사랑』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유의어에 ‘그리움’이 있네요. 부정과 긍정 사이에 있는 단어라, ‘그리움’을 좋아해요. 그리워하면 마음이 허하고 안달복달하는데 그 기반에 애정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저는 항상 저 자신에게 그리움을 느껴요.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처럼요. 내가 나를 껴안지 못하는 시간이 많은데, 그래도 나 아니면 날 아껴줄 사람이 없으니 짠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찾게 되는 게 그리움 같아요. 그리움이 더 정이 많이 가요, 사랑보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아이러니하게 절 사랑하려 할수록 주변이 보여요. 주변이 있기에 제가 있거든요. 살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들을 애정해요. 애정은 사랑하고 정의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정이라기엔 담고 싶은 마음이 크고 사랑이라 하기엔 거창해서요. 


    제가 애정하는 사람들은 다들 진심이 가득해요. 딱 자기 닮은 결로 제게 애정을 줘요. 애정이 쉬운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애정도 여유가 있어야 나누잖아요. 그럼에도 내게 틈틈이 안부를 묻고, 날 궁금해하고, 그리워하는 게 참 애틋하고 고마워요. 저도 사람들에게 애정을 주려고 노력해요. 그렇다고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지는 않아요. 편애해요. 제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더 다정하려고 노력하며. 






잃어가는 것에 대해 부쩍 생각해요.


    해가 갈수록 점잖아지는 우리 집 강아지 꾸미, 한지 냄새로 위안받던 인사동의 한지공방, 쓰다듬는 법을 배웠던 독립잡지 활동, 결을 아끼는 휴스꾸. 그래서 잘 잃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잃음’을 생각하면 역으로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을 한 번은 더 들여다보게 되거든요. 좀 더 다정하게 굴걸, 허한 기분이 들지 않도록. 


    한때는 나를 잃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분명 나에게 몰두해 살아가고 있는데, 나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어쩌면 평생 내 방식 따라 따뜻하게 날 지키고자 해요. 이렇게 보면 잘 잃는다는 건 잊지 않는 것과 같아요.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니라 희미해지는 것. 그렇게 옅어져서 다정한 흔적으로 남겠죠.


    이제까지 나를 잘 돌보는 일을 고민했다면, 이제는 나를 잘 달래는 일을 고민해 보려고요. 앞으로 얼마나 무탈하지 않은 순간들이 많겠어요. 흘려보내야죠. 식물도 이미 죽거나 아픈 잎을 그대로 두면, 그걸 살리겠다고 꾸역꾸역 그쪽으로 영양을 보내잖아요. 이미 흘러간 건 과감히 보내주고 남은 조각들을 꽉 끌어안으려고요. 그렇게 점점 여물고 싶어요.






인터뷰어 윪 / 포토그래퍼 호호

2023.01.15 은강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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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 of skku]
휴스꾸(Humans of skku)는 2013년부터 성균관대학교의 교수, 직원, 학생과 근처 상권까지 인터뷰 대상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장문의 인터뷰 본문, 깊이 있는 사진과 휴스꾸를 꾸려나가는 운영진의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휴스꾸의 모습을 담아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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