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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유 Oct 04. 2024

[8]

손꼽아 기다리던 일병 정기휴가에 만난 형은 공무원 시험공부를 위해 휴학 후 노량진에 있었다. 형이 휴학 한 덕분에 내가 복학을 하더라도 학교를 같이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날 형과 늦은 시간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 군대 이야기로 꽃을 피울 무렵에 바쁜 형의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형은 얼마 전에도 다른 후배를 만났고 시험날이 남았기 때문에 조금은 여유가 있다는 말로 나를 배려해 주었다. 형은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다른 선배들의 소식을 들려주었는데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해서 걱정이 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얼마 전에 만나 잔소리를 했더니 형에게 너나 잘하라면서 입씨름을 벌이다가 다 같이 합격하자는 결론으로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 형으로부터 잔소리를 들은 선배들은 모두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되었다.


형은 원래 사람 챙기는 걸 좋아했다. 돈이 있으면 밥과 술을 사는데 아끼지 않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편의점에서 음료수 하나라도 사서 두 손에 꼭 쥐어 주었다. 모두가 꺼려하는 쓴소리도 마다 하지 않았고 누가 듣더라도 그럴 듯 한 옳은 말만 했기에 대부분이 수긍했다. 어딜 가더라도 환영받고 중심이 되어주는 리더십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주변에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형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사람들이 곧 형의 재산이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나에게는 형이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수험생활을 중요한 경험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고, 시험 합격이 아니더라도 형은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공무원 수험 생활을 전적으로 형이 원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공무원에 뜻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합격이 아닌 수험 생활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도 형에게 수험생활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공부는 잘 되는지, 혼자 지내기가 힘들지는 않은지, 몇 시에 일어나는지, 학원 수업은 어떤지, 모의고사 점수는 어떠한지 말이다.

당연히 형이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되고 궁금하기야 했지만 나까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얘기를 이어가다 보면 형이 하고 싶은 말은 알아서 꺼낼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서로가 부담 없이 같은 편이 되어주는 마음 편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형이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 '하면 하지.'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내는 사람임은 틀림이 없지만 나는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단순하면서 지난한 수험생활이 형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형이 '할 때' 느껴지는 에너지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만큼 짙고 거대하다. 그러나 학교 시험기간이 되면 형의 에너지는 잠시 작아졌다. 그리고 시험기간이 끝나면 다시 활활 타올랐다. 형은 공부에 있어서는 굳음 마음을 먹지 않았던 것 같았다.


붉은빛을 내뿜으며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형은 큰 아들로서 아버지의 기대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된다고 했다. 형이 공부에 전념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형과 아버지 사이의 어색하고 불편함이 되는 것 같으니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기는 것 같다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 어머니와는 대화를 많이 하고 있고, 아버지가 모르는 사건들도 어머니께는 잘 말씀드린다고 하여 안심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말미에는 '하면 하지.'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자식에게 기대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아버지의 마음은 어머니와는 조금 다르다. 아버지는 살면서 경험하고 깨달은 많은 것들을 자식들에게 빠짐없이 전해주고 싶어 하신다. 자식들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이런 마음으로 자식을 끌어당기다 보면 자칫 잘못하여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한번 상처받은 자식들의 여린 마음은 아버지 생각처럼 쉽게 회복되지 못한다. 아버지 역시 자식이라는 존재를 대하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관계를 되돌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자식들이 하는 일, 하고자 하는 일을 지켜보며 쓰러지지 않도록 옆에서 다독이고 뒤에서 밀어주신다. 그러다 보니 힘든 얘기는 어머니와 많이 나누게 되고 아버지와는 거리감이 생기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고 있다. 정답이 없는 문제다.


노란 전등 아래 윤기가 흐르는 소주잔 너머로 그늘진 형의 얼굴을 보았다. 그늘을 지워내려는 어색한 헛웃음과 찡그림. 그리고 이것마저 지워내기 위해 연거푸 잔을 부딪혔다. 형은 시험에 합격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아니면 아버지와의 벽을 허물기 위해 수험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웃고 소통하는 사람다운 삶을 그리워하는 형이 내 앞에 있었다.

그날 저녁, 형은 좁은 자취방의 침대를 한사코 거절하는 나에게 내어주고 바닥에서 잠을 잤다. 지금 누구보다 제일 고생하는 사람은 '나'라고 하며 부대에 복귀하기 전까지 최대한 편하게 지내야 한다고 했다.


형은 수험생활을 마치고 다음 해에 복학을 했다. 그리고 무려 학생회장을 역임한다. 나는 당시에도 군 복무 중이었고, 상병 정기휴가에 형을 만나기 위해 학교를 간 일이 있었다. 작년에 노량진에서 봤던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형이 아니라, 다시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과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치는 형이 있었다. 내가 원래 알고 있던 형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짧은 머리를 감추려 모자를 눌러쓰고, 신입생 때 입었던 옷을 입고 학교에 가니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형을 학생회장으로 맞는 후배들이 부럽기도 했다.


형은 신입생 한 명이 별다른 계획도 없이 자퇴를 하려고 한다며 나에게 소개를 해 주었다. 신입생은 무엇이든 스스로 해 내야 하는 대학생활에 적응이 어렵다고 했고 아직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한 것 같았다. 얼굴 표정부터 매우 어두웠고 걷는 자세도 구부정했다. 걷는 것도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땅 속으로 점점 파묻혀 들어가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자퇴를 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에 형은 학생회장으로서 신입생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형의 요청으로 많은 선배들과 동기들이 나서 신입생의 적응을 도왔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형으로부터 그 신입생이 법원직 공무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은 본인의 노력은 기억하지도 못하고 후배가 수험생활을 열심히 했다며 흐뭇하게 생각했다.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내 좋은 결실을 맺었다며 자랑스럽게 여겼다. 나는 합격의 절반이 형의 몫이라며 형을 치켜세웠다. 그 말에 형은 그 후배가 노력을 많이 한 것이라면서 형의 역할은 미미한 것이었다며 형이 한 일을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학교 특유의 에너지와 상쾌한 공기를 만끽하며 형과 함께 걷는 중에 형은 불현듯 입 한쪽을 가리더니 개미만 한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사실 공무원 시험은 치지도 않았다."


갑작스러운 형의 한 마디에, 나는 형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다만 방세와 학원비, 식비 등을 대시느라 고생하셨을 형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형은 나중에 부모님께 다 갚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공무원이 형과 맞지 않는 옷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힘든 생활을 큰 탈 없이 잘 버텨낸 형이 고마웠다. 그저 에너지 넘치는 형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들뜨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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