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인의 말소자 초본
사망하여 고인이 되신 분들의 초본
간혹 말소된 사람의 초본을 마주할 때가 있다. 당연히 일반인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로 접근하지만 확인해 보면 젊은 나이임에도 사망 신고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버겁고 힘들었을 뿐,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닐진대 유명을 달리했다는 기록을 마주하면 그 사유를 알 수 없음에도 마음이 아린다.
과거 기록을 보면 다른 담당관님들과 통화한 이력도 있고 문자메시지를 발송한 기록도 있다. 그 흔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고도의 불안과 긴장을 주는 그런 뜨거운 것이.
몇 해 전 있었던 일이다. 바로 전달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던 분과의 연락이 끊겼다. 주소지를 확인하고 집까지 찾아가 겨우 임대인과 연락이 닿았고 들려오는 소식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하셨던 분이기에 억장이 무너졌다. 어렵게 유가족과 연락이 되었고, 지원하던 내용을 설명드리고 마무리 짓고자 한번 만나 뵙게 됐다. 사망 원인은 추락사라고 했다. 그 말에 분통이 터졌고 서로 말을 잇지 못하고 굵은 눈물방울만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었다. 가족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유가족은 망인께서 기관의 지원을 받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가족도 신경을 쓰지 못했던 일을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유가족과 내가 각자 망인께 가지고 있던 기억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서로 또 눈물을 흘렸다. 홀로 양육을 하셨는데 아이는 누이께서 입양할 계획이라고 했다. 아이는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상태라고...
세상에 태어나 바다 저편에 있는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노를 저어 보지만 죽음이라는 두 글자 아래 어깨를 나란히 하던 배가 너무도 허무하게 침몰한다. 각자 노를 젓는 방식이 다를 뿐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소중한 사람일 것을, 어떠한 삶을 살았던지 죽음에 이르면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지 싶다.
먼저 떠나는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남아있는 자들에 대한 미안함, 잘 지내라는 응원이고, 먼저 떠나보내는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아쉬움과 미안함,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 온전히 기억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는 그리움과 슬픔이 아닐까.
나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일지 모른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다 갑자기 추락이라도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고민하거나, 불이 났을 때 어떻게 대피해야 하는지, 운전 중에 앞차가 급정지를 하면 어떻게 피해야 할지 항상 내 주변을 살핀다거나 하는 식으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함이 가득한 우리네 삶.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사건들이 많기에 무탈하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소중하고 감사한 것은 이 때문이리라.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그 종착지가 죽음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배우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Who am i'라는 질문에 각자의 가장 '나' 스러운 답을 찾는 것.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 인간 그 자체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 너머까지 고민하여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고난을 지나치고 이겨내며 쉼 없이 나아간다. 이 또한 어른이 되는 과정이리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