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있었던 일이다.
안방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 앞에 어머니와 누나들, 그리고 나까지 넷이 모여, 피곤해서 주무시고 계시는 아버지가 깰까 봐 숨죽이며 드라마를 보곤 했다.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다가도 밤 10시가 되면 자동으로 까치발을 하며 안방에 모여들었다. 혹시라도 누가 늦게 온다 싶으면 곧 시작한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잠꼬대라도 하시는 순간에는 텔레비전을 끄고 고개를 돌리면서 모두가 자는 척을 했다. 그리고 행여나 아버지가 한마디 하실까 긴장하면서 서로 킥킥대며 이 상황을 공유했다. 매일 새벽같이 일을 가시는 아버지의 고단함을 알기에 숙면에 방해가 될까 봐 소리는 기본적으로 음소거였고, 중요할 것 같은 순간에만 소리를 한 칸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리모컨을 가진 사람이 실수로 소리를 잘못 조작하기라도 하면 나머지 3명의 눈은 텔레비전에 있으면서도 눈썹을 찌푸리며 턱을 쭉 내밀고 리모컨을 가진 사람에게 향했다가 돌아왔다. 아버지가 깰까 봐 그러기도 했지만 사실은 감칠맛 나는 음량 조절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소리 없이 화면만 봤음에도 드라마의 스토리가 대부분 이해되었고, 의문이 있는 부분은 드라마가 끝난 후에 토론회를 열었다. 그리고 다음 화에서는 어김없이 누구 예상이 맞았다면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고, 본인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다.
드라마의 명장면은 남녀 주인공이 간발의 차이로 길이 엇갈려서 만나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있는 우리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누구 눈이 더 큰지 대결하듯 서로 눈을 맞춰가며 소리 없는 탄식을 연발했다. 이 엇갈림은 두 주인공의 미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만약 우연하게 두 주인공이 마주쳤다면 어땠을까. 우연히 지나가는 개나 고양이를 만나 잠깐 인사라도 해서 시간을 지체했다면, 우연히 차가 덜 막혀서 신호등을 조금 더 빨리 지났다면, 정말 작은 우연만 더해졌다면 두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을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우연에 대한 고민을 했다.
얼마 지난 후 어느 날, 집에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동시에 옆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드라마처럼 운명적인 사람이 간발의 차이로 나와 엇갈리는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청자가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이 나의 운명의 상대라 해도 아쉽거나 안타까워할 사람이 없다. 나도 모르는 어떠한 엇갈림이 어떤 결과로 연결되는지 떠올릴 수도 없다. 우연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어떤 상황들에 있어서 아쉬움을 느끼기 조차 어렵다. 만약 이를 모두 아는 존재가 있다면 오직 '신' 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살면서 지난 날들 혹은 어떤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일련의 상황들이 만들어졌음을 느낀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서 인연을 맺고, 우연히 그 채용 공고를 보고 입사 지원을 하고,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우연히 또 다른 인연을 만나서 이직을 하고. 이 같은 큰 사건들 속에는 또 다른 수많은 작은 사건들이 연결되어 있다. 한 가지 큰 사건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본다면 쉬이 우연의 우연이 겹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대부분의 크고 작은 일들이 필연이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서로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아보면 하필 그때, 하필 그 시간에, 하필 그 시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많다. 이를 단지 우연이었다고 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도 거대해진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몇 가지 거대한 기회들이 있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았었고 나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시기였다. 몇 번의 좋은 기회들을 놓친 것이 오히려 사색을 즐기고 읽기와 쓰기를 좋아하게 된 지금의 나를 발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매우 좋은 기회들이었기에 한편으로는 큰 아쉬움이 남았었고 마음이 힘든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쉬움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때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아내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마음의 평안을 느낄 수 있었을까, 우리 아이들의 미소를 볼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연보다는 필연이라고 느끼며 작은 일도 소홀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어떤 시간에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모여 서로 대화를 하는 것조차 기적이다. 과연 같은 일이 반복되어 일어날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려 한다. 다신 없을 이 순간들, 우리 삶이 소중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