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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유 Oct 31. 2023

좇는 자와 좇기는 자

무턱대고 좇다 보면 좇긴다.

성공이라는 말.


성공은 곧 그 과정의 끝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의 인생에는 잘 표현하지 않는다.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에게 막연히 '성공했네'라고 말한다. 마치 인생의 목적이 재산 축적에 있는 것으로 여겨, 그 목적을 다 이룬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성공했네'는 부러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초라해지는 자신을 생각하며 주눅이 들기도 한다. 반대로 누군가가 부의 축적이 아닌 작은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성공했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취업했을 때, 회사 업무의 성과가 좋을 때, 어떤 노력의 결실이 있을 때 '고생 많았네.'라고 한다. '고생 많았네'는 부러움 보다는 격려와 인정의 의미를 더 담고 있다. 우리가 성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전적 의미로의 성공은 스스로의 목적 또는 뜻을 이루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것을 이루어 낸 것이다. 여기서 스스로 목적이나 뜻에 해당하는 성공은 추상적 의미가 강하므로 내적 성공이라 하고, 사회적 지위나 부는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으므로 외적 성공이라 하자.


내적 성공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만하면 됐다.' 정도의 자기만족과 편안함, 안정감으로 바꿔볼 수 있다. 이러한 내심의 성공은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 따라 상대적이면서도 그 대상은 무궁무진하여 제한이 없다. 예를 들면, 아무 때나 연락해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몇 명 있다, 월급은 이 정도면 됐고 하는 일에도 자부심을 느낀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는 등이다. 심지어 길가에 핀 한없이 여린 꽃 한 송이를 보고 감동받을 수 있는 것도 성공이다. 또한 특정인 또는 소수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 어느 누구나 이룰 수 있다. 만족하여 안정감을 느끼는 정도가 각자의 기준이 된다.


외적 성공은 특정인 또는 소수만이 받을 수 있는 외부로부터의 시선이다. 남들이 쉽게 이룰 수 없는 권력이나 부를 얻었을 때 이를 보는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지며 '성공했네'라고 한다. 정작 그 본인들은 '성공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성공이란 개념보다는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한다. 지금 이루어낸 것은 저 멀리 있는 끝을 향한 하나의 발걸음이라 생각한다. 우리 속담처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더 높이 나는 놈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그 끝이 어디인지는 쉽게 정해지지 않는다. 적당히라는 것은 의미가 없고,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성공했다고 느낄까? 그때는 바로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외적 성공에 내적 성공이 더해졌을 때다. 지금의 외적 성공에 만족하여 안정감을 느낄 때,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만하면 됐다.'라고 생각한다. 그때 비로소 '이 정도면 성공했다.'라고 한다.


성공이 곧 부와 권력인 것으로 의미가 퇴색된 것만 같아서 안타깝다. 사업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이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인 젊은 사업주에게 방법과 요령을 알려주고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래서 성공하겠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았다. 물론 나쁜 의미로 한 말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느낌도 든다(영상 편집의 영향도 있을 것). 외적 성공만 강조한 나머지,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만 같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부를 쫓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너무 과하게 외적 성공을 강조하다 보니, 부를 쫓다가 오히려 부에 쫓기고 있지는 않나 생각한다.

오래전에 나 역시 부를 쫓아 주식 투자를 했었지만 일상생활이 어려울 만큼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조급한 나머지 쫓다가 쫓기게 되고 말았다. 주식 투자를 왜 했는지도 몰랐다. 남들 다 하니 나도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무지했다. 온종일 오르락내리락하는 차트만 쳐다봤다.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눈부신 차트에 매일의 컨디션이 좌우되는 나를 발견했다. 어느 날 그 종목은 거래가 정지되었다가 다음 해 상장폐지 되어 투자한 금액의 대부분을 잃었다. 당시에도 큰 금액이었고, 지금도 큰 금액이다. 하지만 크게 좌절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큰 공부 했다고 생각했다. 더욱 잘한 일은 그 돈을 다시 만회할 생각을 하지 않고 깨끗하게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투자는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아내와 맞벌이하며 벌어들이는 월급을 아끼는 것으로 부를 쫓고 있다. 그렇다면 부를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도 나는 이만큼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기적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시골에서 소일거리 하며 서로 돕고, 읽고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있는 욕심을 느낀다. 동시에 내 아이들을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해주고픈 욕망이 있다. 그러나 투자를 하거나 무리해서 승진할 생각은 없다. 단지 욕심이 있음을 알아차림에 그친다. 불혹에 가까워지니 나에게 맞는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이 무엇인지 대충은 안다. 내가 버텨낼 압박감과 책임감의 정도를 안다. 한 번에 많은 일을 벌이는 것 버거움을 안다. 대신 사람들을 돕고 소통하며 이야기 들어주는 것이 좋다. 읽고, 쓰며, 생각하는 것이 좋다. 무엇을 쫓아야 하는지를 이제는 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먹고 자는 거 외에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한다. 정말로 한적한 곳에 가서 한량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물려줄 충분한 재산은 없다. 다만, 내 부모님이 그러셨듯 아이들에게 성실함을 물려주고 스스로를 알아갈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겠다. 성공이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알려주겠다. 쫓기지 않고 쫓는 삶을 만들어 가도록 지켜주겠다.


무턱대고 다 보면 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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