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이던, 버스던 의자에 빈자리가 있어도 잘 앉지 않는다. 내가 아주 힘든 것도 아니고, 짐이 많거나 더 많이 힘드신 분들이 앉으시도록 비켜드리는 나만의 배려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시내버스에 빈자리가 너무 많아서 마음 편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점잖은 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 두 분이 조금 거리를 두시고 버스에 올라오시더니 앞뒤로 앉으신다. 버스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각자 먼 산만 바라보시던 할아버지들 중, 뒤에 앉으신 할아버지가 앞에 계신 할아버지 어깨를 툭툭 친다. 할 말이 있으신 것처럼 보였다. 나는 뒤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길을 물어보시려고 그러시나 생각했다. 그런데 앞에 계신 할아버지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주무시고 계신 것도 아닌데, 먼 산을 바라보고 계신데, 깊은 생각에 빠지셨나 생각했다. 민망해하시는 뒤에 계신 할아버지는 손을 쓸어 담으신다. 두 할아버지들에게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긴장하고 있는 것은 나다. 상식적으로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건드리면 돌아보기 마련이다. 내가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주는 것일 수도 있고, 대문처럼 활짝 열린 내 가방 지퍼를 잠그라고 알려주는 경우도 있다. 길을 물어보는 경우도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렴, 사람이 많아서 복잡한 것도 아니고, 시끄러운 상황도 아닌데 대꾸를 하지 않으신다. 나는 지하철에서 호통을 치며 싸우는 어르신들을 종종 봐왔기에, 혹시라도 두 분이 싸우시지는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1분 정도 지났을까. 뒤에 계신 할아버지가 다시 한번 어깨를 툭툭 치신다. 아까는 깊은 생각에 빠져 계신 것이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이번엔 돌아보시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앞에 계신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꿈쩍하지 않으신다. 이번에는 먼 산이 아닌 정면을 바라보고 계신데 말이다. 또 깊은 생각에 빠지신 상태라고 믿고 싶다. 차라리 눈을 뜨고 주무시고 계신 거라면 좋겠다. 그리고 이번에는 분명히 움찔하신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뒤에서 어깨를 툭툭 건드렸음을 알고 계신다. 나는 혹시라도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바로 일어나서 막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두 분 중에 한 분이라도 일어나시면 나도 일어나서 말릴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뒤에 계신 할아버지 역시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다. 포기하셨기를 바랐다. 길을 묻고 싶으신 거라면 차라리 버스 기사님께 말을 거시길 바랐다. 잠깐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팔을 들어 올리시는 뒤 할아버지. 설마 하는 찰나에 뒤 할아버지가 또다시 앞 할아버지의 어깨를 툭툭 치시는 게 아닌가. 보고 있는 내가 울상이 되었다. 이러다간 내가 목적지에 도착해도 버스에서 내리는 게 맞는지 고민이다. 앞 할아버지가 드디어 반응을 하신다. 엉덩이를 살짝 앞으로 빼시고 뒤를 돌아보시려고 한다. 나는 제발 점잖은 말씀을 나누시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이 무슨? 뒤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허리를 숙이시더니 신발을 고쳐 신는 게 아닌가? 용건이 있어서 자꾸 부르시는 게 아니었나?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앞의 할이버지는 뒤를 힐끔 돌아보시고, 허리를 푹 숙이고 있는 할아버지를 무시하고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신다. 뒤 할아버지는 앞 할아버지가 돌아서는 걸 못 보신 걸까? 이젠 누가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 되었다. 헛기침 한 번이 불쏘시개가 되어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신발을 다 고쳐 신은 뒤에 계신 할아버지의 얼굴에 피가 쏠려서 그런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두 할아버지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다시 1분 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었는데, 뒤 할아버지가 갑자기 앞 할아버지가 쓰고 계신 모자를 툭툭 치는 걸 목격한다. 아뿔싸, 이건 아니다. 사람 머리를 건드리는 것은 은연중에 내가 더 우월함을 나타내는 과시적 행위이기도 하다. 아무리 세 번이나 앞 할아버지를 불렀어도,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머리를 건드리는 것은 도를 넘은 행위이지 않은가. 이건 필시 한번 해보자는 메시지나 다름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앞 할아버지는 엉덩이를 앞으로 빼고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신다. 그리고 손으로 뒤 할아버지를 공격하는 것만 같이 팔을 휘두르려 한다. 내 엉덩이는 이미 의자에서 떨어졌고 왼발은 버스 통로 쪽으로 딛고 벌떡 일어나는 중이다.
뒤에 계신 할아버지도 모자를 벗고 팔을 휘두르려고 하신다. 두 할아버지가 모자를 벗고 크게 휘두르는 팔에 가려진 무표정이던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 할아버지들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웃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껄껄껄 웃으신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 상황을 모두 이해했다. 두 분은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어렸을 때 뒤에서 친구들 어깨를 툭툭치고 검지손가락을 세워서 돌아보는 사람의 볼을 찌르는 장난을 쳤었다. 또 뒤에서 툭툭 건드리고 모른 체하기도 했다. 작은 장난인데 혹시라도 통하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했었고, 의도대로 친구를 속이면 그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 아마 처음부터 장난을 치려고 했던 것임을 앞에 앉아계신 할아버지가 간파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머리까지 툭툭 건드리시니 이제는 반응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제야 나도 긴장을 풀고 두 분을 보며 웃는다. 점잖게만 보이던 할아버지들께서 이런 장난을 치실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로 얼마나 가까이 지내시는 사이인지 불 보듯 뻔하다.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큰 행복이다. 다만, 이마에 주름이 깊어지는 만큼 세월이 야속하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철이 안 든다고 한다. 나 역시 공감하는 바이다. 그다지 기분 나쁜 말도 아니다. 나는 지금의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하면서 매일 한 번씩은 웃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지금도 가끔 실수를 하고, 장난도 치고, 애교를 부리며 떼를 쓰기도 한다. 철없어 보이는 행동들이 함박웃음은 아니더라도 아내의 소소한 웃음포인트다. 게다가 딸아이를 웃게 해 주려고 우스꽝스러운 춤도 추고 변신도 한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아직도 철없는 장난을 치며 지낸다.
버스에서 본 할아버지들의 장난이 너무 아름답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행색에 구애받지 않은 소년 같은 모습에 인간미를 느낀다. 이 순간 가장 행복한 두 분이 존경스럽다.
나 역시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내 안의 소년과 더 많이 조우하겠다. 철부지들은 언제나 행복하고 즐거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