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어머니와 누나들이 어린 동생 손하나 까딱하지 않게 챙겨주었기에 집에서 만큼은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다섯 식구가 모여 식사하는 시간에도 냉장고에서 반찬 꺼내기, 다 먹은 후에 냉장고에 반찬 넣고 식탁 정리하는 것이 겨우였다. 무더운 여름에는 교복 상의 2개로 하루하루 돌아가며 입었는데, 매일매일 어머니와 누나들이 손빨래를 해 주어 향긋한 냄새가 나는 교복을 매일 아침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세탁기 사용법이나 마른빨래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방법도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 정리를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워낙 깔끔하셨고, 누나들도 어머니를 닮아 지저분함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거짓말을 아주 살짝만 더하면, 지금도 어머니과 누나들 집은 먼지 한 톨 찾기가 어려울 만큼 깨끗하고 깔끔하다.
나의 10대는 잠깐의 방황을 빼면 특별함이라곤 찾기 어렵다. 방황이라고 한다면 중학생 시절에 춤에 빠져 공부는 나 몰라라 하고 비보잉을 했다. 청소년 댄스 공연과 학교 축제공연 등을 위한 연습에 빠져 살았다. 정말 공부를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면 청소년 복지회관에 있는 연습실에서 매일 비보잉을 했다. 중상위권에 속하던 성적이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인문계 고등학교로 입학을 했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따라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나 자취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20살에 입학해서 졸업하고 결혼할 때까지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자취생활을 했다. 자취 짬밥이 상당한데도 유독 설거지만큼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그릇이 조금 쌓여서 설거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설거지를 하면 30분씩 걸린다. 그릇이 많지도 않은데 설거지를 30분씩이나 한다. 오래 서있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발바닥도 아프다. 세제로 그릇을 닦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물로 헹구어 내는 시간은 더 오래 걸린다. 그릇의 미세한 미끈거림이 세제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아서 오랜 시간 헹군다. 그래서 설거지를 한번 시작하면 한세월이다.
신혼 때도 집안일 중에서 설거지만큼은 자신이 없다고 했다. 너무 오래 걸려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부처님 같은 마음을 가진 아내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알았다고 해 주었다. 아내는 설거지를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끝냈는데 존경심이 일 정도로 감탄스러웠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내가 설거지를 할 때는 30분이 넘도록 그릇을 붙잡고 씨름했다.
첫째 딸이 태어나 내가 설거지를 해야 하는 날이 많아지고 말았다. 혹여나 남은 세제를 아이가 먹을까 봐 더 깨끗하게 닦고 헹구다 보니 설거지 시간은 더 늘어만 갔다. 어느 날, 설거지를 하는 아내 옆에서 설거지를 어떻게 하면 빨리 끝낼 수 있는지 배우려는 마음으로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게 웬일? 내 기준으로 볼 때 아내의 설거지는 너무 대충대충 슥슥 닦고, 대충대충 휙휙 헹구는 것이었다. 나는 그릇에 남아있는 세제를 먹게 되는 것은 아닌지 너무 불안했다.순식간에 설거지를 끝내는 아내에게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비법이 '대충대충'이었다.
'앞으로 설거지는 내가 해야 하나?'
아니다. 자신이 없다. 오래 서 있을 자신이 없다. 검색해 보니 설거지 세제는 수세미에 바로 짜면 안 되고 물에 희석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수세미에 바로 짜서 사용했는데 오래 헹군 게 그나마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내의 비밀을 알고 난 후, 우리는 세제를 희석해서 사용하고 오레 헹구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설거지 참여도가 많이 올랐다. 내가 설거지를 많이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나는 조금 과장해서 산처럼 높이 쌓인 설거지를 하며 대단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온전히 설거지에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릇을 어떤 순서로 씻을지, 공간이 부족하지 않도록 어떻게 쌓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상념이 없었고 정신이 맑았다. 설거지 삼매경에 빠졌다.
그동안은 억지로 쥐어 짜내는 부자연스러운 생각과 집중의 연속이었다. 회사 업무가 그랬고,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다. 쏟아지는 각종 기사와 뉴스에 눈과 귀는 쉴 틈이 없었다. 그런데 설거지에 집중하고 있는 나의 마음이 평온을 찾는다. 설거지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설거지가 상념을 비워내고 마음을 정리하는 수행이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고로 설거지는 아름답다는 결론이다.기쁘다. 내가 아름다움을 알게 되다니!가장 힘들어하던 일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