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키즈카페에 갔다가 오후 느지막하게 집에 들어온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고 소리친다.
"아빠! 아빠! 아빠!"
큰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지금 나랑 밖에 나가자! 나뭇잎 주으러 가야 해!"
유치원에서 나뭇잎을 준비해 오라고 해서 주으러 가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뭇잎으로 미술활동을 할 모양이다.
놀이터 근처에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어 가을임을 느낀다. 아직 풍성해 보이는 나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앙상한 가지 만으로 겨울을 나겠지 싶다.
깨끗한 나뭇잎을 찾으려 해 봐도 보이지 않는다. 바싹 말라버린 나뭇잎 아니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나뭇잎들 뿐이다. 결국 예쁘고 깨끗한 나뭇잎 찾기는 포기하고, 각자 마음에 드는 나뭇잎을 주워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모양이 반듯하면서도 큰 나뭇잎들을 모았고, 나는 아이가 미술 활동 하기에 적당한 크기의 찢어지기도 하고 구멍이 나기도 한 나뭇잎을 몇 개 모았다. 예쁘게 물이 들고 상처 없이 마르지 않은 나뭇잎을 찾고 싶었지만 그런 나뭇잎은 보이지 않았다. 깨끗해 보이는 나뭇잎도 막상 가까이서 보면 어두운 색의 점들이 많았다. 뜨거운 햇빛과 매서운 비와 바람을 견디고 견뎌낸 그들이 이제는 운명을 다해 땅으로 돌아갈 시기가 온 것이니, 그 상태가 온전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사람의 인생과 겹쳐 보여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들 역시 나뭇잎들과 다를 바가 있을까. 작은 존재로 태어나 지칠 줄 모르는 강하고 눈부신 초록빛으로 살다가 상처 입고 병들어 찢기다 못해 구멍까지 뚫려, 다음에 태어날 작은 존재들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것만 같다. 마치 자신의 소임을 다 하였으니, 불어오는 바람 중에 내 바람을 기다렸다가 순서가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련 없이 몸을 던지는 것만 같다.
사람도 때로는 살아 내면서 수없이 고민하고, 견뎌내고, 상처 입고 구멍 뚫리는 일이 다반사인데 마음고생 한번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마음속에 묻어둔 말 못 할 소설 같은 이야기들 몇 개쯤은 다들 품고 있으니 말이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삶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 같아 가을이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언제일지 모를 내 차례, 미련 없이 바람에 몸을 던지기 위해서 오늘도 잠시 뒤를 돌아본다.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나와 대화한다. 인생은 이렇게 마음을 키워 나가는 것이리라, 괜히 나이가 들수록 기품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리라. 그러면서 점점 각자의 영롱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생각한다.
나뭇잎 줍기를 끝내고 산책을 하는데 단풍나무에 반쯤 꺾인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아직은 초록빛을 띠고 있어 아이에게 줄 요량으로 나뭇가지를 마저 꺾었더니 아이가 한마디 한다.
"아빠! 그걸 꺾으면 어떡해!"
예쁜 나뭇잎이 달려 있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이의 말을 들은 순간 앗차 싶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그리고 나뭇잎들에게 바로 사과했다.
"나뭇잎들아 미안해..."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후끈거렸다.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입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고서 인상을 쓰고 있는 58개월 된 딸아이. 콧구멍까지 커졌다. 아이의 눈을 피해 숨고 싶었다. 누가 부모이고, 누가 자식인지 혼란스러운 순간이다. 아무렴 어떤가, 이렇게 서로가 밀어주고 끌어주며 사는 것이 삶인데. 그래서 오늘도 살맛 난다.
그리고 '나무야, 나뭇가지야, 나뭇잎들아 정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