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이 있어 집에서 평소보다 느긋하게 여유를 부린다. 여유라고 해 봐야 라디오를 켜고 거르던 아침 식사를 한다. 그리고 아이들 얼굴을 한번 더 본다. 라디오에서 오늘이 대설이라는데 어제보다도 따듯한 것 같아서 좀 더 얇은 외투를 다시 꺼낸다. 눈을 뜬 딸아이가 평소와 달리 아빠가 집에 있으니 방으로 들어와 아빠를 부른다. 거의 감긴 눈을 비비며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고맙고 또 고마운 녀석. 태어난 지 곧 100일을 앞둔 아들은 새벽에 일어나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 기특하다. 다리 한번 편하게 펴지 못하던 아내는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곤히 잔다. 코 고는 소리마저 차분하고 정겹다. 든든하고 존경스럽다.
출근시간에 서울에서 빠져나가는 지하철은 한산하다. 지하철에 북적이던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어 빈자리가 늘어난다. 어느 틈에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다 보니 앞에는 70대로 보이는 건장한 어르신과 마주 앉아 있음을 알았다. 몇 번 눈 맞춤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이웃님들이 작성하신 글을 읽는다. 오늘은 또 어떤 감동과 가르침을 주실지 긴장과 설렘이 공존하는 순간이다.
갑자기 어르신이 헛기침을 하신다.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일어나신다. 지긋한 나이에도 건장한 체격에 마스크와 따듯한 털모자를 쓰셨다. 해를 등지고 앉아있는 내게 약간의 눈부심과 조금의 위태로운 걸음으로 다가오신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시며 하시는 말씀.
"어험, 이 잠바 어디서 사셨소?"
편하면서도 적당히 따듯하고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 옷이다. 어르신께서는 이 옷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몇 년 전, 썰쌀해지는 날씨에 마땅히 입을 외투가 없어서 아내를 졸라 쇼핑을 갔다. 초겨울에 입을법한 이 옷은 아웃렛에서 눈물을 머금고 20여만 원에 구입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인터넷 쇼핑몰에서 절반 가격에 버젓이 판매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속이 상했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며칠 더 빨리 입었다 생각하고 다음 쇼핑에서는 더 신경 쓰자고 다짐하는 수밖에. 이런 사정으로 이 외투는 애증이다.
"아, 이 옷은 몇 년 된 옷인데 음..."
상표를 말씀드려야 할지, 구입한 곳을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어르신께서 말을 이으셨다.
"옷이 너무 멋있어요. 몇 년 전에...? 백화점 같은 곳?"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연이은 질문세례를 받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웃렛도 제법 규모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드린다. 어르신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시고 불안한 걸음으로 자리에 앉으신다. 그리고 다음 역 안내방송이 나온다. 어르신은 몸이 앞으로 쏠리는 지하철의 기둥과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셔서 문 앞에 서서 내릴 준비를 하신다. 두툼한 패딩을 입으신 어르신의 뒷모습이 보인다. 문이 열리자 찬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떼로 밀고 들어온다. 하차하시는 어르신의 뒷모습에 스며있는 알 수 없는 쓸쓸한 향. 향은 찬 바람을 타고 나를 때린다. 옷을 뚫고 들어와 애증의 외투에 대해 이실직고하지 않은 나를 꾸짖는다.
어르신께서도 감탄하실 나의 패션 감각에 어깨가 으쓱하기도 하다가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하기도 하다. 반대로 어르신 취향인 옷을 입고 다니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가 아무렴 어떠냐로 마음을 정리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혹시라도 아들뻘 되는 나를 보고 아드님께 선물을 하시려고 물어보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 쓸쓸한 향의 정체가 이것이었을까.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아드님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뒷모습에 배어 있던 것만 같다. 그리고 내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르신의 아드님도 나처럼 이따금 아버지를 떠올리실 것이리라. 서로가 서로를 떠올리며 생각하는 것. 아름답다.
어르신이 내리시기 전에 브랜드라도 말씀드릴 걸 그랬다. 백화점에서 사면 너무 비싸니 아웃렛에 가 보시라고 할 걸 그랬다. 인터넷은 더 저렴하다는 말씀도 드렸어야 했다. 모르는 사람이 대뜸 말을 걸어오니 내 방어기제가 발동됐던 것 같다.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도 좋지 않지만 과한 경계 역시 좋지 못함이다. 오히려 무슨 일 이신지 여쭤볼걸 죄송한 마음이 든다.
확신할 수 없는 상황들, 내가 알고 있음보다 모르고 있음이 훨씬 많은 순간들에 직면한다. 처음부터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지 말자. 부담스러워질 때까지 조금은 긴장을 내려놓아도 좋다. 대답을 기다리지 말고 질문을 하자. 서로에게 새로운 사실들이 서로의 하루에 빛을 더한다. 그러니 모두가 필요한 존재다. 있음으로써 따듯함을 준다. 따듯하기에 소중하다. 부족함을 채워주는 이들, 마음을 데워주는 이들이 언제나 바로 근처에 있다. 너무 긴장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