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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유 Jan 12. 2024

미물의 고통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서 가끔 택배로 낙지를 보내주다. 가깝지도 않은 먼 바닷가 근처 수산시장까지 직접 가셔서 낙지를 손수 고르신다. 어쩌다 보니 단골이 되어 해산물은 꼭 가시던 곳만 가신다고. 이번에도 택배가 도착했다. 어림잡아 보아도 20~30여 마리는 되어 보이는 낙지.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으니 소분해서 얼려야 하는데 소분하는 작업이 보통일이 아니다.


낙지가 오는 날에는 아이가 쾌재를 부른다. 낙지를 워낙 잘 먹기도 하거니와, 낙지를 손으로 잡는 것에 들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도 해볼래!'를 연발하며 주방으로 온다. 낙지들은 좁은 공간에 수십 마리가 섞여 있으니 힘이 빠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번에도 나는 지금이다 싶은 마음으로 낙지 소분하기에 호기롭게 덤벼다.


아이가 쾌재를 부르는 다른 이유는 호들갑스러운 아빠가 무척 재미나기 때문이다. 빠는 매번 낙지를 마주할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다. 분명히 맛은 끝내주지만 어디까지나 식탁에 올라왔을 때 할 수 있는 얘기다. 쓰러진 소도 일으켜 세운다는 고마운 생물이지만 식탁에 오르기 전의 낙지를 보는 것은 괴롭다. 더욱이 소분을 하려면 낙지와 직접적인 접촉을 피할 수 없다. 힘이 빠져 보이지만 조금만 건드려도 있는 힘을 모두 쥐어 짜내서 온몸으로 거부감을 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싫어하는 낙지를 힘으로 굴복시켜야만 한다.


손으로 느껴지는 낙지의 마지막 몸부림은 소름이 돋는다. 갯벌에서 만났다면 나와의 사이에 장갑이나 뻘이라도 있을 터다. 허나 지금은 숨을 곳도 없이 발가벗겨져 맨 몸과 맨 손이 마주한다. 긴 다리와 빨판 하나하나가 점점 더 거칠어지고 뻣뻣해짐은 분명 괴로움의 몸부림이다. 이 괴로움은 내 손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져 머리를 쭈뼛 세운다. 더 힘을 줘서 낙지를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낙지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며 얼어붙는 것뿐이다.


어렸을 적에 낚시를 따라 나선적이 있다. 컴퓨터가 보급되는 시기에 낚시 게임이 유행했고 TV에는 낚시 만화도 방영되었다. 주말이면 민물이며 바다며 낚시다녀온 어른들의 얘기도 많이 듣던 터였다. 바늘에 미끼를 끼운다거나, 어떤 떡밥이 좋다더라 등의 얘기로 물고기를 유인하여 낚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적당한 낚싯대 하나를 야무지게 받아 들 물살이 약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렁이 미끼가 들어있는 작은 캔을 열었는데 흙더미 속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몇 마리가 보였다. 흙을 슬쩍 휘저어보니 지렁이는 훨씬 더 많았다.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지렁이들 중에서 한 마리를 아무렇지 않게 잡아 들었다. 그리고 낚시 바늘에 끼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얌전하던 지렁이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함을 눈과 감각으로 느껴버렸다. 나에게는 지렁이를 끼우는 것이 아니라 지렁이를 찌르는 것이었다. 주위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지렁이를 끼우고 있는데 유독 나만 두리번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일단 시작을 했으니 낚싯대라도 휘둘러 봐야 한다는 심정으로 낚싯바늘을 저만치 던졌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낚싯바늘을 보자 갑자기 또다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렁이가 물속에서 숨을 못 쉴 텐데 이렇게 낚시를 하는 것이 맞나? 지렁이는 비가 오면 땅 속에 물이 스며 들어와 숨을 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땅 밖으로 나온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에는 지렁이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지렁이를 물속에 빠뜨린다니? 아니, 낚시를 재밌어하는 게 맞나? 하는 원초적인 의문이 들었다. 내가 느끼기에 낚시는 고통밖에 없는데 어떤 재미가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손맛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지렁이를 먹으려다 바늘에 찔린 물고기의 몸부림을 느끼는 것이 맛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생각의 꼬리를 물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더 기다리지 못하고 낚싯대를 들어 올려 보니 지렁이는 움직임이 없다. 지렁이가 죽었다. 내 평생 단 한 번이자 지렁이의 움직임이 멈출 동안의 낚시질에 어떤 물고기도 바늘에 찔리지 않아 안도했다. 다시 길게 늘어져 움직임이 없는 지렁이를 한동안 멍하게 바라보았다. 멋모르고 달려들어 미안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낚시는 세월을 낚는다고 하지만 나는 고통을 낚았다. 빨개진 볼을 쓰다듬는 쌀쌀한 가을바람이 마치 이 순간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잠깐의 회상에서 정신을 차리니 모든 감각이 낙지에 몸부림에 감겨 들어가고 있다. 나는 낙지를 느낌과 동시에 결국 비명을 지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그럴 줄 알았다며 왜 사서 고생이냐는 눈빛이다. 아내는 내 손에 붙은 낙지를 떼어내고서 잘 잡고 있으라며 옮겨 담을 비닐봉지를 건넨다. 게다가 어느 틈에 준비했는지 비닐장갑을 끼고 있다. 아, 배신감이 든다. 에게 장갑을 끼라고 했어도 거절했을 것이다. 나는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경험하고 느끼기를 좋아한다. 그래야만 도달할 수 있는 생각들이 있으니까. 그래도 배신감이 든다.


아이는 호들갑스러운 아빠를 보고 신이 났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도 해볼래!'를 다시 연발한다.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제일 큰 낙지를 찾아 한 손으로 집어 든다. 그리고 아빠에게 들이밀며 '이것 봐 이거!'를 외친다. 낙지는 머금고 있던 눈물을 바닥에 뚝 뚝 떨어뜨린다. 바닥은 짠내 나는 바다가 된 것만 같다. 아이는 엄마에게 바닥이 더러워지니 장난치지 말라는 한소리를 듣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느새, 손보다 더 큰 낙지를 느낌에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 장하다 우리 아이야. 생명의 소중함, 타인의 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천천히 알아가도 괜찮다. 더 많이 경험하고 직접 느껴보아라. 그럼 평생 잊지 않을 테니.


작은 생명들에게서 조차 전해지는 고통과 괴로움은 견디기 힘든 아픔이다. 하물며 소통이 가능한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고통은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온다.  픔을 느끼는 것은 서로를 지주고 끌어안주는 힘이 된다. 사람은 나누고 베풀어야만 한다. 그래야 내 안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 혼자가 아닌 같이 살아가는 거다. 느끼고 공감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그러니 아픈 감정과 너무 거리를 두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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