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튀르키예 남서부에 위치한 보드룸(Bodrum) 고속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튀르키예에서 휴양지로 손꼽히는 보드룸답게, 정류장은 휴가를 즐기러 온 여행자들로 북적였다.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 열대 과일이 그려진 반바지, 알록달록한 셔츠에 가벼운 샌들을 신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경쾌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행동거지를 살피게 되는 보수적인 튀르키예 동부와는 질감이 다른 가벼운 공기가 흘렀다.
저 멀리서 선글라스를 쓴 중년의 남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남편의 이모부였다. 9년 만에 만난 우리는 양팔을 활짝 뻗어 힘껏 흔들었다. 타지에서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이토록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반가운 얼굴을 확인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모부의 차는 2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은색 수동 기아 프라이드였다. 차는 덜덜덜 거친 소리를 내며 도로로 나섰다.
차는 굽이굽이 언덕을 올랐다. 코너를 도는 순간, 새파란 바다가 언덕 아래로 드러났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와!”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행 엽서에서나 봤을 법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구불구불한 해안선이 언덕 아래 펼쳐져 있었고, 하얀색의 고급 요트와 여객선들이 항구를 따라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해안가 언덕에는 한눈에 봐도 하룻밤에 몇십만 원은 줘야 할 것 같은 콧대 높은 리조트와 별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시내 중심지에 들어서자, 도로 왼쪽에는 레스토랑과 카페가 줄지어 있었다. 여행자들은 바다를 마주하며 한가롭게 홍차를 마시거나 시샤(물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길 끝에는 두툼한 미색 벽돌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보드룸 성이 조명을 받아 한층 더 강렬해 보였다. 거칠고 투박한 매력이 있는 남편 고향 으드르와 달리, 보드룸에는 자유와 낭만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바닷가 반대편으로 방향을 틀어 몇 차례 더 골목을 지나 이모 집에 도착했다. 우리는 식탁 가득 차린 음식을 먹으며 밀린 수다를 떨었다. 38도가 넘는 여름밤에도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뜨거운 홍차는 필수였다. 목청이 유난히 좋은 우리 어머니와 남편의 이모는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웃고 떠들었고, 갑자기 노래를 부르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자정 무렵이었다. 이웃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이렇게 시끌벅적해도 괜찮을까요?”하고 물으니, 이모가 말했다.
“밖에 봐바. 다들 밖에 나와서 차 마시고 있잖아. 여기는 보드룸이야. 뭘 해도 자유로운 곳이지.”
다음 날 아침, 이모와 이모부는 우리를 바닷가로 데려갔다. 바닷물은 발바닥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맑고 시원했다. 아이는 신나서 수영을 시작했고, 나는 고개를 들어 보드룸의 풍경을 찬찬히 살폈다. 저 멀리 섬이 하나가 보였다.
“저기 보이는 섬이 뭐예요? 튀르키예 섬인가요?”
“아니야. 그리스야. 코스(Kos) 섬.”
“진짜 저렇게 가까이 있다고요? 여기서 갈 수 있어요?”
“쾌속정 타면 30분이면 도착해. 우리도 몇 번 가봤어. 시간 되면 한 번 가봐.”
집에 돌아오자마자 코스행 페리 티켓과 숙소를 예약했다. 그리스로 넘어가기로 한 거, 우리는 당장 다음 날 떠나기로 결정했다. 페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보드룸과 코스를 오갔기에 좌석은 넉넉했고, 쾌속정 왕복 티켓도 6만 원이면 구매할 수 있었다. 한국 여권으로는 그리스 비자도 필요치 않으니 모든 일이 쉽고 매끄러웠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보드룸 항구로 갔다. 아침부터 코스 섬으로 떠나려는 여행객들로 티켓 부스는 정신이 없었다. 항구 끝에는 출입국 관리소가 있었는데 아주 작고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두 개짜리 부스에 앉은 직원에게 여권을 건네자, 보는 둥 마는 둥 도장을 찍고는 다 끝났으니 얼른 나가라는 신호로 턱을 가볍게 위로 올렸다. 이렇게 느슨하다니. 누구든 맘만 먹으면 눈 감고도 통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칸타마란(Cantamaran)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배에 올랐다. 배의 단단함과 묵직함이 느껴졌다. 승무원들은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캐리어를 보관 장소로 가져가 끈으로 단단하게 고정해 주는 친절함까지 베풀어 주었다. 우리는 가뿐하게 2층으로 올랐다. 2층에는 바다를 통으로 볼 수 있는 파노라마 창문이 달려 있었다. 구명조끼와 소화기도 문제없이 넉넉하게 준비된 듯 보였다. 이런 배라면 거친 폭풍이 쉴 새 없이 몰아쳐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 코스 섬에 가잖아. 엄마가 전에 시리아 난민 어린이가 바닷가에서 발견됐었다고 이야기한 적 있지? 혹시 기억나? 그 어린이가 바로 이 바다를 건너다가 하늘나라로 간 거야.”
“기억 안나는 거 같아. 근데 난민이 뭐였지?”
“난민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야.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살고, 음식도 해 먹고,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도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어. 시리아는 몇 년째 전쟁 중이거든. 그래서 집에 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서,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야.”
“이 배에 타면 안 돼?”
“탈 수 없어. 시리아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가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거든. 대한민국 여권으로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여행할 수 있지만, 시리아 여권으로는 갈 수 있는 나라가 거의 없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몰래 다른 나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야.”
사실 튀르키예 동부 맨 끝자락에서 서남부 끝에 위치한 보드룸까지 오는 길은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건, 시리아 난민들의 발자취를 한 번쯤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돌멩이처럼 묵직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배는 잠시 흔들거리더니 항해를 시작했다. 나는 아이에게 지금은 지구별을 떠난 시리아 난민 어린이였던 알란 쿠르디(Alan Kurdi)의 이야기를 꺼냈다.
2015년, 세 살 쿠르디의 작은 몸이 이곳 보드룸 해변에서 발견됐다. 우리가 며칠 전 자유롭게 수영을 하던 바다는 쿠르디가 발견된 곳과 그리 멀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아이의 작은 몸은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시리아에서 튀르키예를 거쳐 그리스로 넘어가려던 시리아 난민이었다. 모래사장에 반쯤 얼굴을 묻고 있던 쿠르디의 사진을 처음 본 순간이 기억난다. 내 가슴을 얇은 쿠킹 호일로 저미는 듯한 아주 소름 끼치고 날카로운 감각의 아픔이었다.
튀르키예에서는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했기에, 그리스 국경을 넘으려는 시리아 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유럽연합인 그리스 땅만 밟을 수 있다면, 동유럽을 지나 중유럽을 거쳐 독일까지 갈 수 있었다. 쿠르디의 가족은 안전과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건 항해를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고무보트가 터져 버렸다. 그날 밤, 쿠르디는 엄마, 형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쿠르디의 가족을 포함한 수많은 시리아 가족이 바로 이곳 보드룸에서, 코 앞에 보이는 그리스의 코스 섬으로 도망치기 위해 매일 하나뿐인 목숨을 건다.
내 아이가 태어난 후, 나는 한동안 더 자주 어린 쿠르디를 떠올렸다. 쿠르디의 작은 발에 신겨져 있던 깨끗한 신발을 생각했고, 쿠르디와 함께 큰 아이와 아내를 잃었던 쿠르디 아빠의 비통함을 생각했다. 당시 쿠르디의 충격적인 사진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언론사와 시민단체들은 시리아 난민들의 처참한 실상을 앞다퉈 알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리아 난민을 위한 길거리 행진이 열렸고, 후원금이 모였으며, 난민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인터뷰에 나섰다.
하지만 그 열기는 얼마 못 가 시들해졌다. 시리아 난민들의 이야기는 어째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빛을 잃어 갔다. 시리아 난민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오자,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난민의 죽음을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일상이 되어버린 일에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법이니까. 나 역시 지독한 일상의 패러독스에 빠져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 시리아 난민의 죽음은 더 이상 입에 오르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국경을 넘기 위해 언제 터질지 모를 고무보트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짐을 줄이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해경의 눈을 피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숨 죽여 출발할 필요도 없었다. 이건 시리아 사람들의 몫이었다.
정말 딱 30분 만에 그리스 코스섬에 도착했다. 코스 섬의 작은 항구에서 입국심사를 받을 때, 백발의 직원분이 나와 “그리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며 나와 아이에게 한국어로 환영 인사를 해주셨다. 코스 섬은 휴양하기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니모, 해적선, 인어공주 테마로 화려하게 꾸며 놓은 크루즈를 타고 맑디맑은 옥빛 바다에서 수영하거나, 언덕에 올라 고대 유적지를 탐험할 수 있었다. 밤에는 호텔에서 세계 각국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뷔페와 라이브 음악을 즐길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떠들며 매 순간을 즐기는 이 황홀한 코스 섬의 밤에, 다른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이곳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어수선했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난민이 유럽으로 넘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나라다. 요즘처럼 튀르키예 경제가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시리아 사람들은 점점 더 골칫거리로 여겨지는 듯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은 한나같이 ‘시리아 난민’때문에 살기가 팍팍해졌다고 떠들었다. 보드룸으로 오기 전, 시리아 국경과 맞닿은 도시 가지안텝(Gaziantep)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 하는 고모 딸 데니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난민 아이들도 교육을 받고 있어?”
“언니, 튀르키예에서는 국적에 상관없이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다녀야 해요. 제가 지금 1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데, 절반은 튀르키예 아이들이고 나머지는 시리아 난민 아이들이에요. 갑자기 넘어온 아이들이 많아서 대부분 아랍어만 할 줄 알아요. 학교 수업은 거의 따라오지 못하고 있죠. 그리고 정말 너무너무 가난해요.”
“다른 튀르키예 친구들이랑은 잘 어울려? 보기에 어떤 것 같아?”
“따로 놀죠. 일단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적응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고, 우리랑 다르다고 생각해서 서로 구별 짓기를 하는 거죠. 같이 놀게 하려고 노력하긴 하는데 쉽지 않아요.”
이스탄불은 튀르키예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한 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9년 만에 찾은 이스탄불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외국인들에게 무한한 친절을 베풀던 그 정스러움은 사라져 있었고,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음식값은 서울과 비슷한 수준으로 치솟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요 관광지마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시리아 난민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그림자 같은 존재를 한 번 확인하고 나니, 그 그림자는 더 많이, 더 자주 내 시야에 들어왔다.
모자이크 램프가 갖고 싶다는 아이와 함께 이스탄불 파티 지역에 내려 이집트 파자르 방향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의 흔적을 품은 건물들 사이에 자리 잡은 시리아 난민들이 보였다. 낡은 신발조차 갖지 못한 어린이들의 발가락에는 시꺼먼 때가 끼어 있었고, 흐트러진 머리는 무엇이 엉겨 붙었는지 덩어리져 있었다.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나 가짜 명품 사진을 빼곡히 담은 책자를 보여주며 호객을 하는 난민도, 아기를 안고 낡은 담요에 앉아 멍한 시선으로 우리의 선의를 구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하룬이의 손을 꼭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경계를 침범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 잡힌 내 민낯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타인에게 언제쯤 더 관대해질 수 있을까? 국적, 민족, 언어, 종교를 뛰어넘어 누군가의 아픔을 진정으로 나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림자 같은 사람들은 그림자로 남아도 되는 것일까? 튀르키예 여행이 끝난 후에도 이 물음들은 내 안을 휘젓고 다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