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갑작스러운 후쿠오카 여행은 이메일 한 통에서 시작됐다. 2014년, 나의 막내 이모는 한 기사를 통해 <후쿠오카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을 알게 됐다. 평소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던 이모는 이 모임에 이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10년이 지난 2024년 여름, 이모는 종로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을 방문했다가 그 모임이 불현듯 떠올라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이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10년 만에 연락이 닿았다. 윤동주 시인 모임에 언제든 참석할 수 있다는 답변과 함께였다. 막내 이모는 함께 갈 수 있는지 물었고, 나는 주저 없이 가겠다고 했다. 대신 7살 아이도 함께 갈 수 있는지 물었다.
최근 아이는 일본에 대해 두 가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일제강점기 동안 대한민국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역사를 알게 된 후로는 생각이 복잡해 보였다. 포켓몬스터 카드를 모으는 재미와 아기자기하고 맛 좋은 일본 과자의 맛을 알아 버렸지만, 역사의 쓰디쓴 맛도 함께 알아 버렸다. 일본에 대한 동경과 미움이 한데 뒤섞여 복잡한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을 마음껏 미워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윤동주 시 모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마음에 똬리를 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함께 와도 좋다는 답변을 받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간 것만으로도 이미 잔뜩 신이 났는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출국을 이틀 앞두고 큰 이모의 전화를 받았다.
“금요일에 후쿠오카 간다며? 윤동주 시 모임의 대표님을 내가 예전에 만났던 것 같아. 네가 일본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생각이 있어 사진첩을 뒤졌는데, 우리가 후쿠오카에 살았을 때 같이 찍은 사진을 발견했어. 아무래도 사진 속 여자가 마나기 상(대표)인 것 같더라고. 내가 같이 가도 괜찮을까?”
이모는 전화를 끊자마자 카톡으로 사진을 보냈다. 젊은 이모와 꼬마 사촌 여동생이 일본 여성분들과 함께 오이소박이를 담그는 모습이었다. 기사 속 현재의 마나기 대표의 얼굴과 20년 전의 앳된 얼굴을 번갈아 살피니 분명 같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다섯 명이 일본 후쿠오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들 각자의 목적으로 생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모임은 도착한 다음 날 오후에 있었다. 후쿠오카 시내 중심을 가로지르는 나카강을 따라 모임 장소로 걸었다. 한바탕 비가 난동을 부리며 지나간 뒤라, 후덥지근하던 공기는 어깨를 축 늘이고 있었다. 입구에서 마나기 상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에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몰라 조금은 긴장한 채였다.
“안녕하세요.”
우리가 모습을 보이자 시 모임 회원들이 한국어로 인사를 해주었다. 회의실 중간에는 미음자 형태로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우리의 자리는 맨 앞 정면에 있는 테이블이었다. 각자 자리에 앉아 A4 용지를 삼등분으로 접고 이름을 적어 명패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들어 한 분 한 분께 눈인사를 전했다. 모임에 참석하고 싶다고 불쑥 존재를 알린 우리에게 기꺼이 공간을 열어준 마음이 감사했다. 한 분이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셨다.
“아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저것 챙겨 왔어요. 여기 한국어 그림책들도 빌려왔어요. 아이가 심심해하면 보여주세요. 기차랑 자동차 장난감 중에 원하는 게 있으면 여기 봉투에 담아서 가져가도 괜찮아요.”
말이 끝나자마자 책상에 과자 한 봉지, 플라스틱 기차와 자동차들이 담긴 봉지, 퍼즐 한 개, 도서관에서 빌려온 한국어 그림책 세 권을 조심스레 올려두셨다. 아이를 모임에 데려가고 싶은 내 마음이 혹시 그분들께 폐가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웠는데, 이렇게 살뜰히 챙겨주시는 모습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오늘 모인 사람들은 우리를 포함해 모두 19명이었다. 30년 가까이 길게 이어져온 모임이라 그런지,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과 함께 한국에서 손님이 와주어 반갑다는 이야기를 덧붙여 주셨다. 우리를 위해 한두 마디씩이라도 한국어를 섞어 소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7살 아이의 순서가 되자, 쭈뼛쭈뼛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마디도 못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윤하룬입니다. 7살이에요. 반갑습니다.”
이날 우리가 함께 나눌 윤동주 시인의 시는 《간판 없는 거리》였다. 입시를 준비할 때도 접해보지 못한 낯선 시였기에 일본에 오기 전 몇 번이고 읽으며 내용을 곱씹었다. 시의 내용은 이랬다.
<간판(看板)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흰 와사등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모임에서는 시를 한국어로 한 번, 일본어로 한 번, 다시 한국어로 한 번, 다시 일본어로 한 번, 이렇게 네 번을 읽었다. 새하얀 단발머리를 한 발표자는 윤동주 시인의 생애표를 보며, 이 시가 쓰인 시대적 배경을 정리해 발표해 주었다. 발표가 끝난 뒤에는 각자가 느낀 소감과 질문을 자유롭게 나누기 시작했다. 일본어가 부족한 우리를 위해 마나기 대표가 한국어로 교차 통역을 해주었다. 통역 때문에 진행 속도는 느릿느릿 흘렀지만, 모두들 인내심을 가지고 집중했다.
윤동주 시인이 언급한 ‘정거장’은 어디인지, ‘집 찾을 근심이 없다’는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지, 시인의 산문 《종시(終始)》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의견부터 마지막에 나오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에는 기독교적 정신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일제강점기의 암흑기와 시인의 서정적인 문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이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사람들은 시를 읽기 위해 돋보기를 쓰거나, 활자를 읽으려고 눈을 종이에 아주 가까이 가져가기도 했다. 시인의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을 쏟아내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하나 허투루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모임이 끝난 뒤, 서로의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왔다. 나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오늘 이렇게 저희를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실 아이를 데려 오는 것에 고민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이 모임을 꼭 보여주고 싶어 무례를 무릅쓰고 함께 자리했습니다. 저처럼 젊은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 두 가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을 좋아하는 마음과 우리를 핍박했던 역사의 아픔과 상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그것인데요. 오늘 저희 아이가 일본에서도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정말 감동적인 시간이었어요. 내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있을 윤동주 시인의 추모 행사에도 꼭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 모임이 끝나고 다 함께 식사 장소로 걸어갔다. 어른들이 많아서 평범한 식당으로 가겠거니 했는데, 이자카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로 공간이 나누어져 있고, 조명이 아주 낮게 깔린 오래된 향을 풍기던 이자카야였다. 우리 할머니도 아니고 부모님을 이자카야에 모시고 왔어도 “무슨 늙은이가 이런 공간에 어울리냐”며 어색해하셨을 게 눈에 선했지만, 여기 어르신들은 한 잔씩 생맥주를 마시며 자연스레 이야기에 녹아들었다. 나는 일본 사람들이 윤동주 시인 모임에 참여하게 된 시작이 궁금했다.
“윤동주 시인 모임은 언제부터 참여하셨어요? 그리고 왜 관심을 갖게 되셨어요?”
윤동주 시인 모임에 초창기부터 참여하셨던 분이 대답했다. 84세의 노인이었지만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깔끔하게 다듬은 짧은 머리를 보니 돌아가신 우리 친할머니가 떠올랐다.
“시 모임을 하고 싶어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이 모임을 알게 됐어요. 사실 그때 처음으로 윤동주 시인을 알게 된 거죠. 그때부터 23년째 참석하고 있어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정말 마음이 맑고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져서 좋아요. 나이가 많지만, 윤동주 시인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 중이에요.”
또 한 분은 자신의 딸이 한국인 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자주 들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분도 70대 중반은 훌쩍 넘은 것 같았다. 요즘 한국어 작문 연습을 하고 있다며, 그동안 휴대폰 메모에 차곡차곡 모아둔 한국어 일기도 보여주셨다.
“예전에 사업을 해서 부산항에 자주 갔었어요. 어느 날 시간이 나서 작은 서점에 들러 최근에 나온 시집을 추천해 달라고 했어요. 그때 책방 주인이 가져온 시집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죠. 제 말을 잘못 알아들었던 거예요. 요즘 시집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제 짧은 한국어 덕에 윤동주 시인과 운명처럼 만났습니다.”
테이블에는 말랑한 무가 들어간 어묵탕, 부드러운 계란말이, 쫄깃한 문어 구이, 촉촉한 새우 딤섬, 바삭하게 튀겨낸 치킨, 고소한 계란 샐러드와 완두콩이 놓여 있었다. 웃고 떠드는 사이 모두가 이모가 되고, 삼촌이 되고, 언니가 되어 있었다. 윤동주 시인을 닮은 소박한 사람들이 모인 소박한 저녁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아이는 오늘의 모임을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했다. 오늘 나눈 시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한국어를 거의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의 시간은 어땠을지 알고 싶었다.
“하룬아, 오늘 어땠어? 괜찮았어?”
“음, 좋았어.”
“어떤 점이 좋았는데?”
“다들 말은 안 통하는데,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
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물개 박수를 치며, 입을 벌려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봤다면 “저 엄마 참 교양 없네”하며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찾아 헤매던 답을 찾은 듯한 기분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 깨달음을 위해 우리가 이 여행을 시작한 거니까.
한국에 먼저 돌아간 큰 이모 가족을 통해, 마나기 상이 후쿠오카 공항에서 건네준 선물을 받았다. 아이를 위한 귀여운 카레와 과자, 그리고 사진첩이 들어 있었다. 모임이 끝난 후 찍은 사진들을 편집해 작은 책자로 만들어준 것이다. 책자에는 우리가 시 모임에서 발표를 하고, 단체 사진을 찍고, 이자카야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세심하게 마음이 깃든 하나뿐인 선물이었다. 마나기 대표가 큰 이모에게 전해준 후기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네가 솔직하게 일본인에 대한 불편함을 표현하고, 그럼에도 하룬이에게 다른 의미의 일본인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고 하더라.”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이 날이 되면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교토의 도시샤 대학은 물론, 시인이 처음 유학을 했던 도쿄 릿쿄대학, 그리고 생을 마감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추모 행사가 열린다. 모두 일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꾸리는 행사들이다. 매년 윤동주 시인을 기리며,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시인의 마음을 잊지 않으려는 일본인들이 있다. 내년 2월, 아이와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아 윤동주 시인의 추모 행사에 참석하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