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슬로터다이크역에 도착했다. 토마토색 지하철 출입문으로 들어가니 감귤빛 손잡이가 있다. 한여름의 나뭇잎색, 깊은 바다색, 레몬껍질을 닮은 노랑색을 쓴 표지판에 벌써부터 눈이 즐겁다. 18년 전 처음 암스테르담에 왔을 때도 이렇게 감각적인 도시였던가? 아마 그랬을 테지만, 그때는 관광 명소만 쫓느라 색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베이커리에 놓인 와플도, 바닥에 깔린 벽돌도, 햇빛 아래 책을 읽는 노인도 그냥 스쳐 지나가기엔 어딘가 빛이 났다. 이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감각을 가졌겠구나 싶었다. 역시 반 고흐의 나라였다.
내가 잊고 있던 게 또 있었다. 암스테르담이 '물의 도시'라는 사실이다. '이렇게까지 물이 많았던가?' 싶을만큼 도시 곳곳, 거리 구석구석에 물이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다리 위를 건너야만 다음 거리로 갈 수 있었다.
"엄마, 저기 봐! 오토바이가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아."
아이가 가리킨 곳은 건물 맨 아래층 창고였다. 창고 바닥이 물 높이와 맞닿아 있어, 창고 안에 세워둔 오토바이가 둥둥 떠 있는 듯 보였다. 건물이 이렇게 오래 물속에 잠겨 있어도 괜찮은건지 궁금해졌다. 좁고 길쭉한데 삐딱하게 기운 집들도 재미있었다. 왜 이런 모습으로 지어지고, 또 왜 이렇게나 삐뚤어져 있는 걸까. 카페에 앉아 찾아보니 이유는 하나였다. 많아도 너무 많은 '물' 때문이었다.
암스테르담은 물컹거리는 늪지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무역으로 큰 돈을 벌기 시작하던 17세기에 지금의 운하 벨트가 만들어졌다. 집과 창고를 물가에 붙여 지으면, 배에 물건을 싣고 내리기 좋았고, 홍수가 날 때도 물길을 조절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축축한 땅에 집을 그냥 올릴 수는 없었다. 10미터가 넘는 긴 나무 말뚝을 깊게 박아 그 위에 집을 세웠는데, 말뚝을 많이 쓰면 비용이 늘어나니, 사람들은 좁고 길쭉한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물속에 있는 말뚝이 삐딱해지면, 건물도 함께 삐딱해진다.
“하룬아, 그 이야기 들어봤어? 네덜란드에 한 소년이 있었는데 바닷물을 막는 제방에 작은 구멍이 났대. 마을이 물에 잠길까 봐 그 소년이 밤새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고 있었다는 거야.”
“진짜야?”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야. 그냥 네덜란드가 물이 많은 나라라는 걸 알려주는 이야기지. 그런데 와서 보니까 정말 물이 많긴 하다. 앞으로 지구가 더 뜨거워지면, 암스테르담은 어떻게 될까?”
“그럼 암스테르담이 사라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골목골목 물이 다 올라올 거잖아!”
네덜란드 땅의 4분의 1은 이미 바다보다 낮다. 지구가 더 뜨거워지면, 해수면이 올라 암스테르담 같은 저지대 도시는 정말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네덜란드는 어떻게 대비하고 있을까? 물과의 싸움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번에 책에 쓸 자료를 찾다가 흥미로운 농장을 하나 알게 됐다. 다름 아닌,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플로팅 팜(Floating Farm)’이었다.
아이와 나는 유럽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 로테르담(Rotterdam)으로 갔다. 로테르담 항구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유럽으로 들어오는 물건 10개 중 6개가 이곳으로 들어온다. 항구에는 거대한 크레인이 줄지어 서 있었고, 컨테이너는 산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마스강 위를 따라 커다란 선박들은 부지런히 오가는 중이었다. '이런 곳에 정말 소를 키우는 농장이, 그것도 바다 위에 떠 있다고?' 갸우뚱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새 저 멀리 사진으로만 보던 건물이 서서히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농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플로팅 팜의 피터 대표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대표님은 준비해 둔 슬라이드를 넘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지속가능한 농업이 필요한지, 왜 하필 바다 위에 농장을 세웠는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30분이 넘도록 차근차근 들려주셨다.
"네덜란드는 이미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어요. 홍수가 나면 농촌에서 생산한 식량이 도시로 들어오지 못하겠죠. 그래서 자연재해를 대비해 도시에 스스로 식량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꼭 물 위에 농장을 만들어야 하나요?"
"해수면이 올라가면 농장도 같이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태풍에도 피해가 덜 해요. 처음엔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지금은 세계 도시들이 눈여겨보고 있어요."
"그런데 이 농장은 너무 비싼 아이디어인 것 같아요. 식량 문제로 고통받는 저개발국가에도 확산될 거라고 보시나요?"
"쉬운 일은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선진국이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가난한 나라의 식량을 빼앗지 않아도 됩니다. 각자 필요한 식량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세상은 더 공평해지겠지요."
피터 대표님은 우리를 바다 위 농장으로 안내했다. 길가에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빵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도시에서 버려진 빵이라고 했다. 버려지던 음식이 이곳에서는 소의 사료가 되고 있었다.
농장은 3층 구조였다. 먼저 바닷물 아래에 자리한 1층으로 내려갔다. LED 불빛 아래 상추와 케일, 시금치, 허브가 줄지어 자라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채소는 2,000명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했다. 옆 칸에는 치즈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는데, 쿰쿰한 냄새가 퍼지자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얼른 2층으로 도망가 버렸다.
2층에는 분뇨를 비료로 바꾸는 시설과 바닷물을 걸러내 깨끗한 물로 만드는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가자 마흔 마리쯤 되는 젖소들이 건초를 뜯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자동 청소기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소들이 싼 똥을 치우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 출입구 옆에는 육지로 이어진 긴 통로가 있었는데, 소들이 원하면 언제든 그 길을 따라 풀밭으로 나가 자유롭게 풀을 뜯을 수 있다고 했다.
"예전에 엔지니어로 일하셨을 때와 지금 지속가능한 농장을 운영할 때를 비교하면, 뭐가 더 행복하세요?"
"지금이죠. 지구와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까요. 예전엔 기름이 둥둥 떠 있던 항구였는데 지금은 나비와 벌, 동물들이 찾아오는 곳이 됐습니다."
나는 잠시 상상해봤다. 한강 위에도 이런 농장이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서울은 농장과 멀리 떨어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먹는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모른다. 이 농장이 정말 기후위기의 해답이 될까? 확신은 없었다. 인류의 운명을 걸기에는 아직 너무 비싼 실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 곳곳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웠다. 작은 균열이 변화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우리는 농장에서 만든 요거트와 우유를 구매해 숙소로 갔다.
"엄마! 오늘 밤 진짜 여기서 자는 거야?"
우리가 묵을 숙소는 바다 위에 떠 있었다. 'SS 로테르담'이라는 크루즈인데, 지금은 항해를 멈추고, 바다 위 호텔이 됐다. 1959년에 태어나 2008년까지 대서양을 건너 뉴욕을 오갔던 배였다. 휴대폰 카메라로는 한 번에 담기지 않을 만큼 커서 '위대한 여인(La Grande Dame)'으로 불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는 잔뜩 신이난 강아지처럼 앞장서 달려갔다.
빨간 카펫이 깔린 호텔 로비로 들어서니, SS 로테르담이 바다를 가르며 달리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크루즈 체크인 데스크 앞에는 선장 옷과 선원 복장을 한 직원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마치 크루즈에 막 승선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룸키와 안내지를 받았다. ‘The Ocean Post’라는 작은 신문에는 배 안에서 즐길 수 있는 시설과 다양한 이벤트 정보가 담겨 있었고, 페이스트리처럼 켜켜이 접힌 손바닥만한 지도에는 SS 로테르담이 층별로 소개되어 있었다. 나와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는 서로를 보며 킥킥 웃었다. 하룻밤 묵는 호텔일 뿐인데도 마치 바다를 건너는 긴 항해를 시작하는 듯했다.
길고 좁은 미로 같은 통로를 따라 방을 찾았다. 짐을 풀고는 호텔에서 준 지도를 들고, 배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3층에서는 퀴즈쇼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술잔을 들고 앉아 사회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는 층을 오르내리며 배 곳곳을 둘러보았다. 벽에는 오래된 항해 사진과 역대 선장들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계단 손잡이는 세월에 닳아 번들거렸다. 낮게 깔린 조명과 빛바랜 샹들리에, 붉은 빛이 감도는 나무 패널까지, 모든 것이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갑판에 오르자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저 멀리 로테르담의 불빛이 물 위로 번져 흩어졌다.
방에 곧장 들어가긴 아쉬워 호텔 바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평소에는 들어가지도 않았을 공간이지만, 그날만큼은 그냥 지나치기엔 몹시 아쉬운 마음이었다. 비록 바다를 가르는 진짜 크루즈는 아니지만, 모두들 크루즈 여행에 흠뻑 취해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영화 세트장 같은 ‘Captain’s Lounge’에서는 ‘Strangers in the Night’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엄마랑 30분만 데이트하자!”
푹신한 가죽 소파가 바를 중심으로 둥글게 놓여 있었고, 오크로 만든 네모난 바에는 금속 장식이 둘러져 있었다. 마치 1950년대의 공기를 그대로 품은 듯했다. 선원 복장의 바텐더들은 바삐 손을 놀리며 음료를 만들었다.
사실 이 숙소를 고른 가장 큰 이유는 ‘지속가능 인증’을 받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할 때 우리는 되도록 다국적 체인 호텔 대신, 조금은 번거롭더라도 현지에서 운영하는 친환경 숙소를 찾으려 한다. 다행히 네덜란드에서는 그런 숙소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숙소를 알아보던 중, 항해를 멈춘 크루즈를 되살린 SS 로테르담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버려질 뻔한 배를 호텔로 되살린 것도 그렇지만, 환경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Golden Green Key' 인증까지 받은 곳이었다. 게다가 아이에게는 ‘바다 위에서 보내는 하루’라는 생각보다 훨씬 특별한 경험도 선물할 수 있었다.
"엄마, 여기는 내가 가봤던 호텔 중에서 제일 멋있어. 배가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호텔이 될 수도 있구나. 정말 멋진 아이디어네. 이렇게 하면 쓰레기도 줄어드는 거잖아. 네덜란드 사람들 진짜 똑똑해."
네덜란드는 기후위기를 준비하는 거대한 실험실 같았다. 도시 곳곳에 뻗은 운하와 바다 위의 농장, 그리고 우리가 묵은 지속가능 인증 호텔까지, 모두가 물과 함께 살아가야 할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언젠가 바닷물에 잠길 걸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뭘 제일 먼저 해야 할까?"
"에이, 엄마는! 수영부터 배워야지!"
지구가 뜨거워지는 걸 멈추지 못해, 너무 뜨거워진 미래를 상상한 적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수영을 필수로 알고 살아가는 삶, 배움도, 사랑도, 일도 모든 것이 배 위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이었다. 침대에서 눈을 감고 수영부터 배워야 한다는 아이의 말을 생각했다. 배는 파도에 밀려 밤새도록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