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에서 만난 사람들

네덜란드

by 윤예림

"여기 어디쯤인 거 같은데...이 거리가 맞겠지?"


황금빛으로 칠해진 지붕 양쪽 끝에는 용 머리가 달려 있고, 그 아래로 단단히 뻗은 굵은 회색 돌기둥에는 용이 몸을 틀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줄마다 홍등이 꽃처럼 피어 있었다. 마라 향이 코끝을 스치던 이곳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차이나타운이었다. 우리가 찾아가려는 공간이 바로 이 안에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자주색 외벽의 건물을 한 번 지나쳤다가, 되돌아와서야 ‘이준열사 기념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초인종을 눌러야 했다. '찡'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자, 우리는 힘껏 문을 밀고 2층으로 올라갔다. 1620년대에 지어진 3층짜리 건물의 계단은 좁고 가팔랐고, 오를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계단을 오르자 왼쪽으로 이준 열사의 흉상이 놓여 있었다. 나와 아이는 잠시 고개를 숙여 묵례를 올리고, 천천히 공간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벽은 사진과 지도, 당시의 상황을 담은 기사 같은 자료들로 빽빽했다. 헤이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그 불법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명의 특사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고 찾아왔던 도시였다. 이 기념관은 이준 열사가 생을 마감한 호텔을 개조한 곳이었다. 한쪽 벽에는 큼지막하게 그가 조국을 떠나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온 여정을 보여주는 지도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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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근데 나는 좀 이해가 안되는 게 있어. 우리나라에서 헤이그까지 가는 데 64일이나 걸렸다고 했잖아.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거야?"


"엄마도 그게 궁금해서 아까 관장님께 여쭤봤어. 만약 조금만 더 일찍 헤이그에 도착했다면 회의장에도 늦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럴 수 없었냐고. 그랬더니 그때 독립운동가들에겐 돈이 없어서 중간중간 모금을 하며 길을 이어가야 했다고 하셨어. 게다가 일본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어서, 조심조심 움직이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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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의 마지막 방에는 이준 열사가 순국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에는 수많은 태극기와 편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그가 입었던 옷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 공간을 둘러볼수록 마음 한켠에 의문이 일었다. 이준 열사는 일본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대신 회의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의 입장을 알렸지만, 세계의 귀를 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사이 또 다른 특사였던 이위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구하러 자리를 떠났고, 바로 그때 이준 열사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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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되살리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그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나?'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감시를 피해 두 달 넘는 고생 끝에 네덜란드 헤이그까지 도착했는데, 성과가 없다고 곧바로 자살한다는 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나는 이 기념관의 송창주 관장님께 여쭈었다.


"말이 안 되는 거죠. 제가 평생을 걸쳐 자료를 모았지만, 이준 열사의 사인을 기록한 최초 출처는 당시 네덜란드에 있던 일본 공사에서 만든 서류 딱 한 장뿐입니다. 거기에 '자살'로 적혀 있어요. 그러나 여러가지 자료와 정황들을 살펴 봤을 때, 진짜 사인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어요. 일본이 이준 열사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일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지만, 이준 열사의 사인이 여전히 '자살'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교과서에서 그가 자살했다고 배운다. 아직도 우리는 없애버려야 할 일본의 흔적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방명록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짧은 글을 남겼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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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한국에는 언제 안 들어 오세요? 한국이 그리울 때는 없으세요?"


"다른 것보다 한국 된장이 제일 그리워요. 마트에 파는 된장은 끓이면 끝맛이 씁쓸해져요. 시골에서 만든 된장은 푹푹 오래 끓여도 끝맛이 떫지 않고 달달해지거든요. 여기 살다 보니 그 맛이 자꾸 생각 나요."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송관장님은 역사를 지켜내기 위해 인생을 걸고, 묵묵히 시간들을 쌓아가고 있다. 그 헌신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한다. 나와 아이는 언제고 이곳을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했고, 또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 그 기억을 지키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송장관님은 헤이그에서 우리가 만나야 할 또 한 명의 사람을 소개해 주셨다. 철학자 스피노자였다.


"이 건물을 나가서 왼쪽으로 쭉 걷다가,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보면 교회가 하나 나와요. 그 건물 뒤쪽으로 가면 고요한 곳에 자그마한 스피노자의 무덤이 있어요."


스피노자라는 이름에 가슴이 일렁였다. '책으로 만났었던 그 철학자 스피노자란 말이지? 수도 없이 듣어왔던 철학자 스피노자? ' 우리는 관장님께 다시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스피노자를 만나러 거리로 나섰다.


가는 길에는 국제사법재판소가 자리한 '평화궁'이 있었다. 이곳은 이준 열사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다 일본의 방해로 들어가지 못했던 곳이다. 순간 '만약 회의를 참석할 수 있었으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하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곧 멈추었다. 송장관님도 "젊은이들아, 목표는 평화란다"라고 이야기해주시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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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사이로 고요히 서 있는 교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뉴베이커르크 교회였다. 정원 한가운데 교회가 자리하고 있었고, 우리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건물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스피노자의 묘비가 있었다. 바닥에는 검은 화강암 돌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하얀 대리석 판이 세워져 있었다. 사방에는 새소리만 가득했다.


"여기에 꽃이 하나도 없네. 내가 가져다 놓아야겠어. 좋아하실 거야."


아이는 정원을 한 바퀴 돌더니 들꽃을 꺾어 묘비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아이의 헌화는 30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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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피노자를 늘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기독교가 절대 권위를 쥐고 있던 시대에 신은 멀리 있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눈앞의 자연 그 자체라고 말했다. 또 종교가 정치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고, 사람들에게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로서는 너무 앞선 생각들이라 사람들은 스피노자를 비난했다. 스피노자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났고, 생계를 위해 작은 방에서 유리를 갈아 렌즈를 만들며 글을 썼다. 나는 그의 말들 중에 '진짜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세계를 제대로 아는 지성의 기쁨'에서 온다는 말이 참 좋았다. 그의 생각들은 오늘날 자유주의의 씨앗이 됐다. 참으로 멋진 사람.


어떤 죽음은 시간이 흘러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어떤 죽음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길을 비춘다. 오늘 하루, 그들이 걸었던 길을 나도 따라 걸어보았다는 사실만으로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너무 늦지 않은 때에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 기념관을 지키고 계신 장관님께 할머니가 직접 담그신 된장과 고춧가루를 보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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