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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Jun 26. 2024

현충일에 2007년 2월 27일  기억하기

Hoya가 살아갈 세상

(이 글은 2024년 6월 6일에 쓴 글입니다)


매년 2월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벌써 20년 가까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이역만리 키르키즈스탄 미군 공군 기지에서 잠깐 만났던 사람. 망자亡者.


지인들에게 매년 2월이 가까워오면 묻곤한다.


'2007년 2월 27일이 무슨 날인지 아니?'


대부분은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기억을 헤집는다. 마치 2007년 2월 27일에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나는 상대방의 아련한 기억을 찾는 그 눈을 흥미롭게 쳐다보며 잠시 기다린다. 돌아오는 대답은 정확한 기억이라기 보다는 본인과 관련된 시절로 대답한다.


'그 날에 머했는지 기억이 안나. 그냥 그 해에 취업 준비하느라 바빴어.'


'아마 복학 준비했을걸?'


'아마 알바하고 있었을걸?'


그리고는 나에게 도로 묻는다.


'도대체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한다.


'야! 너는 내가 군대에서 제대한 날도 모르냐? 내가 군대에서 얼마나 뺑이 쳤는데. 8사단 수색대에서 고생하다가, 아프가니스탄 파병도 갔다왔잖아!'


그러면 상대방은 피식 실소한다. 나는 그 실소를 기다렸다가 상대방에게 다시 얘기한다.


'네이버에 윤장호 하사라고 검색해봐.'


네이버에 윤장호 하사라고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1980년 9월 21일에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에 미국 유학을 갔다. 인디애나 대학교를 졸업했고 병역 의무를 위해 11년만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입대 전에 잠시 투자회사에서 근무하다가 2005년 6월에 군에 입대하여 특전병이 되었다.


2006년 9월에 다산부대 8진 소속으로 통역병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2007년 2월 27일 바그람 기지에서 탈레반의 자살폭탄테러로 인해 전사하였다. 향년 26세. 통역병인 터라 현지인 기술교육 통역을 위해 기지 정문 앞에 나가 있던 중에 변을 당했다. 미군 1명과 현지인 노무자 20명 등이 사망한 테러였다...


그때부터 상대방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어떤 말을 할지 기다린다. 대화의 주도권이 나에게로 넘어오는 순간이다.


그런 상대방에게 나는 말한다.


'내가 등록금 벌려고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간 거 알지? 내가 다산부대 7진 이었거든, 윤장호 하사는 다산부대 8진 이었고, 내가 하던 일을 했던 거 같애. 나는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군생활 무사히 마치고 2007년 2월 27일에 제대했지.'


상대방은 다음 이야기를 눈으로 재촉한다.


나는 애써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동기들이랑 제대 신고 마치고 신나게 부대 나와서 순대국을 먹고 있는데, 뉴스 특보로 저 소식이 방송됐어.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어.'


상대방은 묻는다.


'윤장호 하사랑 친했어?'


나는 대답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임무 시작 전에 키르키즈스탄 미군 공군 기지에서 임무 교대 하거든, 그 때 잠깐 봤어. 그런데 이제는 그 때 기억도 가물가물해. 내가 봤던 사람이 윤장호 하사가 맞는지, 겨우 6개월 먼저 경험한 아프가니스탄 생활을 조금 알려주면서 허세 부렸던 상대방이 그 사람인지...'


그리고는 덧붙인다.


'윤장호 하사가 베트남전 이후로, 파병으로 전사한 최초 한국군이래. 그리고 그 날 같이 사망한 미군 병사가 지점보라는 멕시칸인데, 그 사람도 알아.' 그리고는 멕시칸 지점보가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기지 초소에 그려 놓았던 그림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멕시칸 지점보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은데 다음에 소개하고자 한다)

<뒤에 있는 벽면의 캐리커쳐가 멕시칸 지점보가 그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왜 이런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하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러 사람이 이 날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나를 아는 가까운 지인들부터.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느끼고, 관심을 갖고, 무언가 잘 못 됐음을 알아차리고 결국 연대할 수 있음을 믿는다. 전쟁, 파병, 테러라는 거대 담론을, 더군다나 현재 한국에서는 낯설기만 한 이 담론을, 구체적인 내 지인의 이야기로 전해질 때는 더 이상 낯선 거대 담론이 아니다. 내 지인의 구체적인 경험담이고, 곧 나의 이야기가 된다.


한 젊은이가 이역만리 파병을 갔고, 그곳에서 억울하게 죽었다. 잠깐 나라가 떠들썩 했지만 결국 잊힌다. 그리고 거대한 힘에 의해 억울한 죽음이 또  발생한다.


나는 억울한 죽음이 잊히는 것이 싫고, 또 비슷한 죽음이 발생하는 것이 슬프다.


2014년 4월 16일 이전 나에게는, 2007년 2월 27일이 년도와 날짜 그리고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유일한 날이었다. 하지만 2014년 4월 16일 이후, 하루가 더 늘었다. 년도와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그날 무슨 날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날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30개월된 Hoya(글쓴이 아들)가 내 품에 안겨 낮잠을 자고 있다.

나는 아들을 안은 채 핸드폰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이 글을 통해 감히 소망한다.


'호야는 전쟁도, 파병도, 억울한 죽음도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수 있기를'


(공교롭게도 오늘은 현충일이다. 2월은 아니지만 이 글을 보는 이들이 윤장호 하사를 기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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