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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Aug 29. 2024

어느 미얀마인 노동자의 슬프지 않은 이야기

직장인 짧은 소설

내 이름은 모 카잉 모(Maw Khaing Maw)이다. 한국에서는 모모로 불린다. 한국나이로 23살. 할머니와 나 단둘이 가족이다.


오빠가 한 명 있었는데, 한국에 돈 벌러 갔다가 사고로 죽었다. 엄마 아빠는 선생님이셨는데,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는 그냥 사고로 돌아가신 줄로 알았다.


내가 대학교 입학할 때 할머니께서 말해줬는데, 부모님은 군인한테 끌려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민.주.화.운.동.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은 미얀마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껄로우라는 동네에 있다. 한국사람들은 동남아라고 하면 덥다고만 생각하는데 우리 동네는 해발이 높아서 그렇게 덥지는 않다. 날씨가 추워지면 입김도 나고 마을 곳곳에 얼음이 얼어서 그 위에서 미끄러지고 놀았던 기억도 난다.


추우면 할머니가 장갑도 만들어주고 목도리도 만들어 주셨다. 한국 올 때 목도리는 챙겨서 왔는데, 주위 언니들이 이 목도리는 참 예쁘다고 했다. 어렸을 때는 오빠를 따라다니면서, 연을 많이 날렸다. 껄로우의 맑은 하늘에 연을 날리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미얀마 껄로우에서 아이들이 연을 날리는 장면


오빠는 어렸을 때 공부를 잘했다. 대학도 저 멀리 양곤으로 가서 한국어를 배웠다. 어렸을 때 오빠에게 왜 한국어를 배우느냐고 물었다. 오빠는 이렇게 대답했던 거 같다.


"한국이 식민지도 겪고, 민주화 운동도 열심히 했잖아. 그런데도 저렇게 잘 살잖아. 나는 한국을 배우고 싶어. 그리고 나도 잘 살고, 우리 가족도 잘 살고, 미얀마도 잘 살게 했으면 좋겠어."


오빠는 대학을 마치고 꿈을 이뤘다. 한국에 있는 김해라는 도시의 공장에 취직했다.


오빠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많은 돈을 송금했다. 덕분에 할머니는 병원도 다니고 나는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나도 오빠를 따라 양곤에 있는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다.


내가 한국어를 전공한 이유는 오빠와는 조금 다른데, 나는 가수 빅뱅이 좋았다. 특히, 대성이. 대학 친구들은 대성이가 못 생겼다고 하는데 나는 대성이 좋았다.


2학년을 마치고 운 좋게 부산에 있는 한 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었다. 물론, 오빠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오빠는 돈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공부만 하라고 했다. 부산과 김해는 가까우니깐 오빠도 자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컸다.  


"하이고, 불쌍해라..."


내가 한국사람들한테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다. 내가 미얀마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얀마가 불쌍한 건지, 내가 불쌍한 건지, 아니면 미얀마에서 온 내가 불쌍한 건지, 아니면 전부 다 불쌍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한국 남자들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종종 놀라곤 했다. 대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동남아 사람이라고 하면 쉽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래도 대학생이 대시하면 쉬이 웃어넘길 텐데, 한 날은 편의점 아저씨가 시답잖게 작업을 걸었다.


"몇 살이야? 남자친구는 있어? 내 애인 할래? 내가 용돈 많이 줄게."


"아저씨. 저 돈 많아요."


그리고는 그 편의점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은 참 좋은 점이 많다. 특히 맛있는 게 많다. 돼지국밥, 밀면, 족발, 삼겸살, 짜장면...


갈 곳도 많다. 태종대, 을숙도, 자갈치 시장...


아 맞다. 제주도도 가보고 싶은데 제주도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같이 가기 위해 아껴뒀다.


1년 만에 한국에서 오빠를 만났다. 오빠는 많이 피곤해 보였다. 살도 많이 빠지고.


오빠는 애써 담담하려고 노력했다. 그럴 필요 없었는데...


"요즈음 일이 많아서 그래. 사장님도 잘해주고 한국 사람들도 친절해."


미얀마에서는 술을 전혀 안 마시던 오빠가 한국에 와서 술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막걸리를 시켰다.


"모모도 어른이니깐, 한 잔만 마셔볼래?" 그때 하얀 막걸리를 처음으로 마셨다.


"오빠, 막걸리 쓰다."


"응, 처음에는 쓴데, 막걸리 마시면 껄로우 생각이 나더라."


"왜? 막걸리랑 껄로우랑 무슨 관계야?"


"막걸리를 쌀로 만들거든. 미얀마 사람들도 쌀 좋아하잖아. 어렸을 때 엄마가 쌀을 쪄서 빵 만들어 줬잖아. 막걸리를 마시면 꼭 그때 생각이나."


그때는 몰랐다. 그게 오빠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지는.


오빠가 공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시신을 보지도 못했다. 뜨거운 용광로에 오빠가 빠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오빠의 유품을 챙기러 김해에 있는 공장 기숙사에 갔다. 기숙사라고 해봐야 두 사람이 누우면 공간이 부족한 그런 방이었다.


오빠의 짐도 오빠의 인생만큼이나 단촐했다. 작업복 2벌과 평상복 2벌. 그리고 할머니와 나랑 껄로우에서 찍은 사진 액자.


오빠랑 같이 방을 쓰는 사람도 미얀마 사람이었다. 그 사람과 어렵게 통화 할 수 있었다. 오빠가 정말 용광로에 빠져 죽었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쉽사리 대답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 오빠에 대해 말해줬다.


우리 오빠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했다. 미얀마 사람뿐만 아니라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이 차별받고, 대우도 잘 못 받으니깐 오빠가 대표로 항의했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오빠를 좋게 보지 않았다고. 1년 전부터는 야근도 일부러 많이 시키고, 힘들고 어려운 일만 시켰다고 했다. 하지만 오빠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한편으론 계속해서 동남아 사람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고 한다.


눈물이 났다. 오빠가 보고 싶었다. 그 후로 오빠가 보고 싶으면 나도 막걸리를 종종 마셨다. 오빠가 말한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회사에서는 3백만 원을 위로금으로 줬다. 그래도 우리 오빠가 성실하게 일해서 위로금을 주는 거라고 했다.


위로금을 받은 그 날. 어렸을 때 오빠와 함께 껄로우에서 연을 날리는 꿈을 꿨다. 


모모가 꾼 꿈은 이러지 않았을까...


바그다드Cafe의 웹소설 <대박인생> 중에서 일부 발췌 및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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