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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Sep 27. 2024

직장인의 위하여, 이중섭의 위하여

참 좋았더라

회사 관련 행사가 있어서 P 바닷가 동네에 다녀왔다.  큰 행사였던지라, 전국각지에서 모인 직장인과 P 바닷가 동네의 유력 정치인이며 공무원들도 많이 참석했다. 다종다양한 조직에서 다양다종한 사람들이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정치계와 경제계의 우호스러운 잔치였다.


잔치에 좋은 음식과 술이 빠질 수는 없다. 그리고 우호를 다지는 '위하여'도 빠질 수 없었다. 정치인 몇 명과 직장인 몇 명이 건배 제의를 했고 끝은 '위하여' 떼창으로 마무리했다.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좋은 행사에 빠질 수 없는 좋은 음식과 좋은 술


가볍게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면서 옆에 앉은 다른 직장인, 정치인과 무색무취한 대화도 조금 곁들였다.


요즘 사업은 어떠세요?

경기가 안 좋아서 큰 일입니다.

도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려운 데 관경이 하나 되야죠.

...

...

...


그렇게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 안. 먼가 허전했다. 행사도 잘 끝났으며 음식도 훌륭했다. 위.하.여.도 훌륭했다.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하지? 배도 부르고 괜찮은 기념품도 받았는데, 서울에 도착하면 오후 5시 즈음이고 바로 퇴근하는  직장인 개이득인데, 왜 이렇게 공허하지?


이유 없는 허전함과 공허함이 감쌀 때는 책을 찾는다. 다행히 이번 출장에는 종이책도 챙겼다. 


요즈음 읽고 있는 종이책은 김탁환 작가의 <참 좋았더라: 이중섭의 화양연화>이다.


이중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동양의 피카소. 소를 가장 잘 그렸던 화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예술로 승화한 아버지이자 남편. 


그리고 비극적인 말년. 생활고로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냈고, 이중섭은 홀로 한국에 남았다. 1953년에 일본에 가서 잠깐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였으나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나이 40세에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참 좋았더라>는 김탁환 작가께서 예술가로서 가장 찬란했던 이중섭만의 시간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쓴 책이다.  소설 형식이긴 하지만 작가는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중섭이 머물고 봤을법한 풍경을 쫓으며 고증했다. 이 소설은 T라는 바닷가 마을이 주된 배경인데, 이중섭을 포함한 근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모습도 자세히 묘사한다. 이중섭 예술의 화양연화* 시기를 그린 소설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


소설에서 이중섭의 생김새를 표현한 부분이 퍽 인상적이었다. (소설에서는 경상도 방언으로 표현했다)



"방상시 할배요! 우리 중섭 선생님 못 보셨십니꺼? 요코밑으로 수염을 길렀고예. 이마가 들나게 머리를 넘갔는데 단정하게 빗은 건 아이라예. 눈이 윽빨로 깊고 쫌 슬픕니더. 지가 끄는 리어카를 따라오고 계셨심더."


딱 이 사진이다. 윽빨로 깊고 쫌 슬픈 눈.

그리고 1953년 12월 T 바닷가 마을 성림다방에서 이중섭 개인전을 진행하며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한 술자리를 묘사한 장면도 와닿았다.



이중섭이 유치환과 함께 주점으로 들어서자, 술잔을 여러 번 비워 몸짓과 목소리가 커진 예술가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유치환은 통영의 문화계를 이끄는 좌장이었다. 김춘수와 김상옥이 보필하듯 좌우를 지켰도 맞은편은 오늘 개인전을 연 이중섭의 몫이었다. 그 곁은 유강렬, 김용주, 전혁림, 박생광 등 화가들이 차지했다. 유강렬이 일어선 채 말했다.


"시간두 없는데 청마 선생님까지 오셨으니, 이중섭 화가 개인전이가 더욱 빛남다. 자, 요렇게 다들 모인 것두 오랜만임다. 잔들 채웁시다. 건배하구 축하 말씀 한마디씩 하는 게 좋지 않겠슴까? 이중섭 화가르 위하여!"


"위하여!"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마 알아채셨으리라, 80년의 시차를 두고 P 바닷가 마을과 T 바닷가 마을에서 각각 '위하여'가 울려 퍼졌다. 같은 '위하여' 이지만 절대 같지 않는 '위하여'란 것을. P 바닷가 마을에서 울려퍼진 직장인의 '위하여'는 공허한 '위하여'이다. 반대로 T 바닷가 마을에서 울려 퍼졌던 이중섭의 '위하여'는 윽빨로 깊고 쫌 슬픈 '위하여'이다.


행사를 마친 내가 공허에 빠진 이유를 정확히 알았다. 직장인의 위하여는 무색무취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예술가들은 각양각색하기 때문에 공허하지 않고 깊었던 것이다. 결국, 공허에 빠지는 직장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만의 색을 찾아야 한다.


T 바닷가 마을에서 완성한 <소> ㅈㅜㅇㅅㅓ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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