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관련 행사가 있어서 P 바닷가 동네에 다녀왔다. 큰 행사였던지라, 전국각지에서 모인 직장인과P 바닷가 동네의 유력 정치인이며 공무원들도 많이 참석했다.다종다양한 조직에서 다양다종한 사람들이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정치계와 경제계의 우호스러운잔치였다.
잔치에좋은 음식과 술이 빠질 수는 없다. 그리고 우호를 다지는 '위하여'도 빠질 수 없었다.정치인 몇 명과 직장인 몇 명이 건배 제의를 했고 끝은 '위하여' 떼창으로 마무리했다.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좋은 행사에 빠질 수 없는 좋은 음식과 좋은 술
가볍게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면서 옆에 앉은 다른 직장인,정치인과무색무취한 대화도 조금 곁들였다.
요즘 사업은 어떠세요?
경기가 안 좋아서 큰 일입니다.
도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려운 데 관경이 하나 되야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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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기차 안. 먼가 허전했다. 행사도 잘 끝났으며 음식도 훌륭했다. 위.하.여.도 훌륭했다.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하지? 배도 부르고 괜찮은 기념품도 받았는데, 서울에 도착하면 오후 5시 즈음이고 바로 퇴근하는 직장인 개이득인데, 왜 이렇게 공허하지?
이유 없는 허전함과 공허함이 감쌀 때는 책을 찾는다. 다행히이번 출장에는 종이책도 챙겼다.
요즈음 읽고 있는 종이책은 김탁환 작가의 <참 좋았더라: 이중섭의 화양연화>이다.
이중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동양의 피카소.소를 가장 잘 그렸던 화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예술로 승화한 아버지이자 남편.
그리고 비극적인 말년. 생활고로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냈고, 이중섭은 홀로 한국에 남았다. 1953년에 일본에 가서 잠깐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였으나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나이 40세에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참 좋았더라>는 김탁환 작가께서 예술가로서 가장 찬란했던 이중섭만의 시간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쓴 책이다. 소설형식이긴 하지만 작가는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중섭이 머물고 봤을법한 풍경을 쫓으며 고증했다. 이 소설은 T라는 바닷가 마을이 주된 배경인데, 이중섭을 포함한 근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모습도 자세히 묘사한다. 즉 이중섭 예술의 화양연화* 시기를 그린 소설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
소설에서 이중섭의 생김새를 표현한 부분이 퍽 인상적이었다. (소설에서는 경상도 방언으로 표현했다)
"방상시 할배요! 우리 중섭 선생님 못 보셨십니꺼? 요코밑으로 수염을 길렀고예. 이마가 들나게 머리를 넘갔는데 단정하게 빗은 건 아이라예. 눈이 윽빨로 깊고 쫌 슬픕니더. 지가 끄는 리어카를 따라오고 계셨심더."
딱 이 사진이다. 윽빨로 깊고 쫌 슬픈 눈.
그리고 1953년 12월 T 바닷가 마을 성림다방에서 이중섭 개인전을 진행하며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한 술자리를 묘사한 장면도 와닿았다.
이중섭이 유치환과 함께 주점으로 들어서자, 술잔을 여러 번 비워 몸짓과 목소리가 커진 예술가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유치환은 통영의 문화계를 이끄는 좌장이었다. 김춘수와 김상옥이 보필하듯 좌우를 지켰도 맞은편은 오늘 개인전을 연 이중섭의 몫이었다. 그 곁은 유강렬, 김용주, 전혁림, 박생광 등 화가들이 차지했다. 유강렬이 일어선 채 말했다.
"시간두 없는데 청마 선생님까지 오셨으니, 이중섭 화가 개인전이가 더욱 빛남다. 자, 요렇게 다들 모인 것두 오랜만임다. 잔들 채웁시다. 건배하구 축하 말씀 한마디씩 하는 게 좋지 않겠슴까? 이중섭 화가르 위하여!"
"위하여!"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마 알아채셨으리라, 80년의 시차를 두고 P 바닷가 마을과 T 바닷가 마을에서 각각 '위하여'가 울려 퍼졌다. 같은 '위하여' 이지만 절대 같지 않는 '위하여'란 것을. P 바닷가 마을에서 울려퍼진 직장인의 '위하여'는 공허한 '위하여'이다. 반대로 T 바닷가 마을에서 울려 퍼졌던 이중섭의 '위하여'는 윽빨로 깊고 쫌 슬픈 '위하여'이다.
행사를 마친 내가 공허에 빠진 이유를 정확히 알았다. 직장인의 위하여는 무색무취하기 때문이고,반대로예술가들은 각양각색하기때문에 공허하지 않고 깊었던것이다. 결국, 공허에 빠지는 직장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만의 색을 찾아야 한다.